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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란 / 이현호 시인

작성자문이레|작성시간19.11.17|조회수373 목록 댓글 0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

수란 /

 

 

 

 

휘휘 저은 뚝배기 안을 뱅글뱅글 돌며 익어가는 수란

그때

 

잘 안다고 믿었던 네가 그만……을 말했을 때 등허리 어디쯤 새까만 점들이 몇몇 모여 사는지 다 알면서도 꼭 처음 본 사이처럼 너를 새로 알아야 했을 때 먼 데 눈동자를 붙박은 네게서 살결을 부비지 않고도 가장 은밀한 마음결을 느꼈을 때

 

괜히

 

가자 하고 미루기만 했던 놀이동산이 떠오르고 겨드랑이 밑에 사는 여릿한 점의 안색도 돌보고 싶고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서 하룻밤쯤 보냈어야 했는데 생각하다가 생각을 생각하다가 너는 차마 나를 버리고 나는 감히 너를 버릴 수 없는 일이었을 때

 

정말 만났을까, 우리는

만나기는 한 걸까

 

그때 마주보는 마음만을 사랑이라 믿다가 뒷모습에서 진짜 너를 만났을 때 후후 불어 식힌 수란을 서로의 밥그릇에 덜어주던 그 집을 다시 혼자 찾았네 숟가락으로 겨우 건질 수 있을 정도로만 겉이 익은, 까딱 터져버리는, 끈적하고 샛노란 그 육질을

 

끝내 터뜨리지 못할 때



빈방 있습니까 /

 

 

 

눈감으면, 눈동자와 눈꺼풀 사이가 천지간입니다

막막입니다 누운 키보다 낮은 천장입니다

 

어떤 말은 입이 아니라 눈 밖으로 쏟아지고요

(넌 세상에 묻은 얼룩일 뿐이야, 그리고 모든 얼룩은 실수지.)

 

닫힌 눈꺼풀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얼룩이 있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면 얼룩은 썩 괜찮은 장래희망입니다

곰팡이에겐 감각기관이 없겠지요 아플 줄 모르겠지요

감각할 줄 모르는 자들이 소유를 합니다

시간을 지낼수록 검버섯같이 더욱 짙어지겠습니다

 

오늘 강수확률은 50%입니다, 외출하시는 분들은……

차마 끄지 못한 텔레비전은 또 정답을 말하고 있습니다

빗소리는 계약서도 없이 방안에 들어 고이고

계세요, 나를 씻으러 오는 소리가 있고

나는 내가 있는지 없는지 물어볼 사람이 없습니다

 

(99%쯤 나를 잃고 1%로 살아갈 수 있다면)

 

얼룩은 그게 자기 일이라서 점점 흐리고 옅게 번져갑니다

무늬와 얼룩의 계급 차이는 얼마만 한지

흐리다 옅다 번지다 같은 일도 나의 이력이면 좋겠습니다

떠도는 나의 벽지(僻地)는 풍습같이 새로운 벽지(壁紙)가 필요합니다만

 

풀을 바른 듯이 눈감고 있다 보면

좁은 홑창을 비집고 온 햇살에 미안한 마음이어서

열어둔 문으로도 낯설지만 뻔히 알 듯한 얼굴들이 들락거리고

 

나라가 망해도 사람은 남겠습니다

우리는 옛날에 사라진 나라의 문자 같은 표정을 하고

서로의 복덕(福德)을 빌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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