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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화선 시집 『저녁의 가방』 대표시

작성자시산맥|작성시간24.03.13|조회수42 목록 댓글 0

뒤란

 

 

 

  바랜 지붕 위로 부재의 세월이 지나갔군요. 낯선 풍경으로 덧칠해진 고향집은 나를 잊었나 보네요. 앵두나무 그늘 밑의 우물은 뚜껑이 닫힌 지 오래되었고, 봉선화 붉던 장독대는 흔적을 지웠네요.

 

  밑동만 남은 무화과나무, 뽕나무 잎사귀만 희미하게 나를 알아보는 듯 초록 손 흔들어주는데요. 어디서 달려오는 걸까요. 문 걸어 잠근 낡은 화장실에서 코에 익은 향기가 날아오네요.

 

  겨울 끝자락을 서둘러 밀어내고 피어난 제비꽃, 그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나를 말없이 받아 주는 곳은, 어두컴컴하던 뒤란이었네요. 뒤란이 그간의 안부를 물어오네요. 달려가 품 안에 안기고 보니 나, 아직 뒤란에서 살고 있었네요.

 

 

 

 

 

 

 

 

저녁의 가방

 

 

 

병실 어둠을 베고 누운 그녀를

낡은 가방이 지켜주고 있다

 

저녁이면

가방이 비밀의 문처럼 열린다

희미한 불빛 아래서

소꿉놀이를 하는 아이처럼

차디찬 바닥에 작은 살림을 차린다

화장품, 속옷, 베개, 슬리퍼, , 작은 이불……

수첩 속에는 가족사진도 들어 있다

 

구석진 곳 우두커니 놓여 있는 가방에

그녀의 눈길이 자주 머문다

가방이 그녀를 끌고 다닌 듯

빨간 신호등도 무시하고 달려온 그녀를

 

저녁이면

가방의 세계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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