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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바스 외 1편/ 이사과 시인

작성자시산맥|작성시간24.04.03|조회수79 목록 댓글 0

크레바스

 

 

 

 

작업대 위 조각난 운동화*를 올려놓고 복원사는 시간을 소환한다

 

물성의 고요와 세포들의 떨림 안과 밖의 격랑을 더듬는다

 

머리에 탄이 날아와 박힐 때 벗겨진 신발 밑창이 크레바스처럼 갈라져 있다

 

이른 계절의 실족이 앙다물듯 크레바스를 견디고 있다

 

시간을 영원으로 복원하는 일 이것은 재현인가 기록인가

 

운동화엔 가능한 그날의 흔적을 기워줘야 한다

 

조각조각 떨어져 나간 기억을 맞추고 얼룩을 되살린다

 

일그러진 거죽에 조금씩 빛이 돈다

 

귀틀에 안창을 박고 본체를 붙이자 기우뚱 배 한 척이 세워진다

 

낙타는 걷는 자세로 모래사막에 누워 있다 웅크린 뼈와 형상이 곧 지도인

 

신발을 유리관에 앉히고 스위치를 켜자 길 하나가 걸어 나온다

 

 

* 이한열의 운동화

 

웹진시인광장20243월호

 

 

 

트렁크

 

 

 

내가 근무하는 사무실 아래층엔

레스토랑이 있다

 

오후 다섯 시 전에 레스토랑에 가면

싼값에 늦은 점심을 먹을 수 있다

밀쳐 놓은 서류를 떠올리며 나는

주문한 메뉴를 기다리고

 

휴대폰을 검색하다 창가에 앉은 손님들과

눈을 마주치기도 한다

나는 손님들 대화를 한 귀로 흘리며

일이 끝나면 편의점에 들러

베리향이 나는 와인을 한병 사야지 생각한다

 

야근이 끝나갈 무렵

레스토랑 셔터 내리는 소리가 차르륵 울린다

 

레스토랑에서 본 이들은

커플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신비로운 웃음과 조용한 말투가

자꾸만 떠오르고

 

늦게 도착한 버스엔 앉을자리가 없다

 

흔들리는 차창 밖에서 한 여자가 계속해서

손을 흔들고 있다

손이 향하는 방향에 내가 서 있었다

 

시야에서 여자가 사라질 때까지

손잡이는 엉거주춤 나를 흔들고

 

어떤 저녁은 몸도 마음도

닳은 비누처럼 딱딱해서

찬물로는 잘 씻겨지지 않는다

 

나는 웅크린 몸을 욕조에 풀어놓고

오늘은 와인을 한잔 해야지

되뇐다

 

한데 오프너 없이 어떻게 마개를 따지

하필 이럴 때

화장지 없는 사람의 기분이 된다

 

지퍼를 드르륵 열고 들어가 나는

트렁크에 나를 집어 넣는다

 

 

월간 <모던포엠> 20244월호

 

 

 

이사과_2024년 현대경제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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