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이젠 지겹다고 안 할게/ 천수호 시인

작성자홍혜향|작성시간24.04.09|조회수43 목록 댓글 0

 

이젠 지겹다고 안 할게

 

 

천수호 

 

 

1.

 

당신이 사랑이라는 말을 처음 시작할 때

발에 걸리는 줄넘기 같은 저 산은

파도를 밑변으로 받치고 있었다

 

당신이 손을 뻗어 저 산의 뒤쪽을 얘기할 때 나는

몸속 파도가 퍼붓던 애초의 격정과

나지막한 봉분의 속삭임을 뒤섞고 있었다

 

당신은 그렇게 왔고 또 그렇게 떠났다

 

오고 또 갔다고 했지만 그곳이란 원래 없는 것

파도가 풀어내는 바다

 

당신이 다시 온다면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해도 이제 지겹다고 안 할게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다 다르다고 생각할게

갈매기가 한쪽 발을 적실 때와

통통배가 빠르게 지나갈 때의 파도가 다르듯이

 

 

2.

 

떠난 지 오 개월이 지난 지금도

누군가는 당신 조의금을 보내온다

당신이 저 바닷물에 녹아드는 데 오 개월이 걸린다고 했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어떻게 그렇게 천천히 걸어들어갈 수 있는 건지

 

바닷물이 소금이 되는 데 한나절이면 된다는 내 말에

당신은 또 저 건너편 기슭으로 달아난다

다시는 안 돌아올 기세로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파도의 겹겹 또는 첩첩

그 깊은 물결 속으로 당신이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들어가는 것은

 

마지막 호흡과 맥박과 혈압을

곤두박질치는 수치로만 지켜보았던 그때처럼

 

터지는 파도, 삼키는 파도, 뒹구는 파도, 놀라는 파도 사이로

또 한번 지는 굵고도 붉은 당신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천수호, 문학동네, 2020.11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