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지겹다고 안 할게
천수호
1.
당신이 사랑이라는 말을 처음 시작할 때
발에 걸리는 줄넘기 같은 저 산은
파도를 밑변으로 받치고 있었다
당신이 손을 뻗어 저 산의 뒤쪽을 얘기할 때 나는
몸속 파도가 퍼붓던 애초의 격정과
나지막한 봉분의 속삭임을 뒤섞고 있었다
당신은 그렇게 왔고 또 그렇게 떠났다
오고 또 갔다고 했지만 그곳이란 원래 없는 것
파도가 풀어내는 바다
당신이 다시 온다면
했던 말 또 하고 했던 말 또 해도 이제 지겹다고 안 할게
그 말이 그 말 같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다 다르다고 생각할게
갈매기가 한쪽 발을 적실 때와
통통배가 빠르게 지나갈 때의 파도가 다르듯이
2.
떠난 지 오 개월이 지난 지금도
누군가는 당신 조의금을 보내온다
당신이 저 바닷물에 녹아드는 데 오 개월이 걸린다고 했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어떻게 그렇게 천천히 걸어들어갈 수 있는 건지
바닷물이 소금이 되는 데 한나절이면 된다는 내 말에
당신은 또 저 건너편 기슭으로 달아난다
다시는 안 돌아올 기세로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파도의 겹겹 또는 첩첩
그 깊은 물결 속으로 당신이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들어가는 것은
마지막 호흡과 맥박과 혈압을
곤두박질치는 수치로만 지켜보았던 그때처럼
터지는 파도, 삼키는 파도, 뒹구는 파도, 놀라는 파도 사이로
또 한번 지는 굵고도 붉은 당신
「수건은 젖고 댄서는 마른다」, 천수호, 문학동네, 20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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