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춤/김정식
음악이 뽕짝 된다
한 사나이가 두루미처럼 한 발을 든다
하얀 구레나룻이
부천역 나무 광장과 어울린다
비비고 비비는 비빔밥처럼
얼큰한 신명이 붙는다
한 사발의 음악에 실려
눈을 감고 웃는 듯 우는 듯
맨발의 까만 지휘봉을 젓는다
카라얀의 불빛 너머
악보 없는 거리에서
광장의 사계를 쓰고 있다
종달새 오르내리는 봄,
후두둑 떨어지는 후박나무에 장맛비,
창끝을 매다는 찬바람에
관절을 꺾으며 웅크린 밤,
거꾸로 서 있는 거리에서
오랫동안 바라본 별의 발자국,
자기를 잊고 하늘의 소리를 들어 본다
광장의 골짜기 따라
돛을 단 목선이 사계를 읽고
장좌불와, 빨갛게 익은 가을
고추잠자리 떼가 어깨에 붙는다
-월간『우리詩』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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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식 시인
서울교대 초등수학교육 및 동 대학원 졸업
2020년 월간《우리詩》신인상으로 등단
제 20회 공무원문예대전 은상 외 공모전 4회 수상
시집 『먼 산』이 있음.
*노숙자의 춤, 광장에서 완성되는 삶의 예술
김정식의 시 〈어떤 춤〉은 부천역 광장에서 춤을 추는 한 사나이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히 스쳐 지나가는 존재의 깊이를 천천히 드러낸다. 음악은 뽕짝이고, 무대는 광장이며, 춤을 추는 이는 맨발의 노인이다. 이 장면은 자칫하면 도시의 소음 속에 묻혀버릴 평범한 풍경일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이 인물을 동정이나 연민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광장의 중심에 서서 음악을 지휘하고, 계절과 시간을 써 내려가는 예술가로 형상화된다. 이 지점에서 시는 노숙자를 사회적 문제의 대상이 아니라, 삶과 예술의 주체로 다시 세운다.
시의 첫 장면에서 “한 사나이가 두루미처럼 한 발을 든다”는 표현은 노인의 춤을 희화화하지 않는다. 두루미는 동양적 상상력 속에서 고결함과 장수를 상징하는 존재다. 이는 노숙자의 몸이 비록 낡고 가난해 보일지라도, 그 몸짓 속에 오랜 시간과 품격이 축적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하얀 구레나룻이 광장의 나무와 어울린다는 묘사는 그가 도시 공간에서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스며든 풍경임을 보여준다. 그는 광장에서 쫓겨나야 할 사람이 아니라, 그곳을 구성하는 하나의 계절이다.
‘뽕짝’이라는 음악 역시 중요하다. 뽕짝은 흔히 통속적이고 저급한 음악으로 평가받아 왔다. 그러나 시 속에서 이 음악은 “얼큰한 신명”을 불러일으키며 삶의 에너지가 된다. 이는 예술의 가치를 고급과 저급, 중심과 주변으로 나누는 기준을 해체한다. 노숙자의 춤은 세련된 기교나 완성도를 갖추지 않았지만,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이라는 점에서 가장 근원적인 예술에 가깝다.
특히 “맨발의 까만 지휘봉”이라는 표현은 이 시의 핵심 이미지라 할 수 있다. 지휘봉은 오케스트라를 통솔하는 권위의 상징이지만, 여기서는 맨발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이는 예술이 제도와 권위, 물질적 조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낸 몸 자체에서 발생함을 보여준다. 카라얀이라는 서양 클래식 음악의 상징이 등장하지만, 진짜 음악은 공연장이 아닌 ‘악보 없는 거리’에서 연주된다. 이 장면에서 노숙자의 춤은 고급 예술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위계를 넘어서는 삶의 예술로 자리 잡는다.
시의 중반부에 펼쳐지는 사계절의 이미지는 이 춤이 단순한 즉흥적 행동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종달새가 오르내리는 봄, 후박나무에 떨어지는 장맛비의 여름, 관절을 꺾으며 웅크린 밤의 겨울, 그리고 빨갛게 익은 가을의 풍경은 한 인간이 통과해 온 생의 시간이다. 특히 ‘관절을 꺾으며 웅크린 밤’이라는 구절은 노숙자의 신체적 고통과 노쇠를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비극으로만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고통은 춤 속에 스며들어 하나의 리듬이 된다. 그의 몸은 하루를 버티는 도구가 아니라, 시간을 기억하는 기록지다.
‘장좌불와’라는 불교적 표현은 이 춤을 수행의 차원으로 끌어올린다. 오랫동안 앉아 있으면서도 눕지 않는 수행처럼, 노숙자의 삶 역시 긴 인내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 인내 끝에서 춤은 놀이가 아니라 존재의 증언이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잊고 “하늘의 소리를 들어 본” 존재이며, 그 순간 광장은 단순한 도시의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우주로 확장된다. 고추잠자리 떼가 어깨에 붙는 장면은 자연과 인간, 시간과 몸이 하나로 이어지는 순간을 상징한다.
이 시가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노숙자를 설명하거나 규정하지 않는 태도에 있다. 시인은 그의 과거를 말하지 않고, 가난의 원인을 묻지 않는다. 대신 그는 춤을 추고, 계절을 읽고, 별의 발자국을 오래 바라본다. 이는 노숙자를 사회 문제의 객체가 아니라, 세계를 감각하고 해석하는 주체로 복권시키는 윤리적 시선이다. 독자는 그를 판단하기보다 바라보게 되고, 바라봄 속에서 자신의 시선 역시 돌아보게 된다.
〈어떤 춤〉은 결국 묻는다. 우리는 누구의 삶을 예술로 인정해 왔는가, 그리고 어떤 존재를 의도적으로 외면해 왔는가를. 노숙자의 춤은 광장에서 잠시 스쳐 가는 장면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완성된 한 인간의 생애다. 그 춤은 가난하지 않으며, 오히려 삶이 끝까지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조용하지만 단단한 선언처럼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