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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진 시집 『두릅나무 위에 앉은 초록 수행자』 대표시

작성자시산맥|작성시간26.06.05|조회수38 목록 댓글 0

비누

 

 

 

바흐의 음악이 꽃잎처럼 내리는 세면장받이에

양장 차림으로 앉아 있는

너는,

 

먼 길을 걸어온 나의 발을 씻겨주는 탈무드의 행간

이다 눈먼 원시인으로 사는 나의 이정표이고, 나의

절망을 건져 올리는 콘트라베이스의 3번선이다 빈방

의 낮달로 떠 있는 나의 풍경소리다 각으로 채워진

나의 몸을 지워주는 늙은 철학자이고, 내가 고통의

푸른 채찍에 휘감길 때 울어주는 목어소리이다

 

내가 철없이 다가가도 사라지지 말아야 한다

 

허물어지는 내 몸을 재건축해주는 늙은 건축가이

고, 번뇌에 둘러앉은 나를 해방시키는 법문이고, 허

무의 깃발로 펄럭일 때 황급히 찾아온 새벽의 여인이

고, 나를 잊어버린 나를 찾아주는 사립탐정이고, 사

막에서 타들어 가는 나를 적셔주던 어머니의 베적삼

이고, 겨울잠에 취한 나를 깨우는 성당의 종소리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너는 내 운명의 배를 젓는 사공이므로, 내가

피죽바람이 되어도 소멸하지 말아야 한다

 

 

 

국어사전에서 실종된 ‘찐빵’의 근황

 

 

 

한양분식집에 흰 가운을 입은 그가 온화하게 앉아 있다

 

학교 정문으로 쏟아져 나오는 열세 살 푸른 영혼들의

오후 3시의 허기를 쫓아내는

주술사로 산다

 

찜통암자에서 수행을 끝내고 진열장에 앉아 있는 그는,

매의 발톱 같은 겨울바람과

태양이 옷을 벗는 계절의 저녁을 통과하며

 

58년 개띠들의 지난 기억을 불러오는 흑백사진이다

궁핍의 터널을 지나다가 낮달로 떠 있던 나와

정한수를 떠 놓고 기도하다가 북천으로 떠난 노모를

 

이어주는 이동통신사다

실눈의 북풍이 창틈을 비집고 들어올 때

그는 어린 다섯 손가락들의 질긴 겨울밤을 몰아내는

 

살찐 하얀 보름달이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을 걷고 있지만

한땐, 한파에 움츠린 지하방 그림자의 겨울신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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