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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경 시집 『말이 사라진 자국』 대표시

작성자시산맥|작성시간26.06.09|조회수27 목록 댓글 0

나의 근대성

 

 

요절하지 않았다

오래된 엘리베이터처럼 어둠이 조용히 아래로 잠기고 있을 뿐이다

뭔가 해야 한다라는 말이 어깨에 내려앉았고

그때는 양어깨가 분명 있었는데 지금은 옷걸이에 남은 무게만 남아있다

플레이리스트, 몇 개의 구겨진 계절

손에 잡히는 것들은 잠시 얼굴이 되었고 거울은 자주 바뀌었다

삶은 켜진 채 놓인 물건처럼 살아짐쪽으로 기울었다

가라앉는다는 말은 내 등 뒤에서 습기처럼 숨을 쉬고 있었다

바스락거릴 때마다 서랍 속 공기가 새어 나왔고

깨어난 건 말이 아니라 접어 둔 종이 속의 거짓들이었다

달력의 빈칸들이 눈을 붙잡았다

일정과 채권자 이름, 카드값, 해야 할 목록이 검은 잉크로 먼저 자리를 잡았다

펜 끝이 흔들렸고, 문장은 조금씩 흩어졌다

아침은 시작되었으나 밤은 빈손으로 끝났다

복도에 센서 등이 켜졌다가 꺼지듯

다음 날도 잠시 열렸다가 닫혔다

그 끝을 알지 못한 채 날마다 아래로만 사라졌다

동사만 남아 흔들렸고 라는 명사는 서류 맨 아래에서 흐려졌다

요절은 없었다

살아 있는 채로 잠겼다

아직 버튼을 누르지 않았을 뿐이다

 

 

 

상수에게

 

 

불변을 끝까지 붙들 수 있을까

우연뿐인 세계

사람들은 직선만 고집한다

그것을 상수라 부른다

 

너를 위한 행복한 고통이었다

마른 빵을 허겁지겁 입에 쑤셔 넣고 씹더니

조용히 가셨다

 

수염 좀 깎아라

아버지 마지막 말이다

 

부패와 우연으로 굴러가도

싫은 것 앞에서 자주 멈췄다

 

상수 쪽으로만 손이 간다고?

 

부엌 식탁 위, 아직 치우지 않은 그릇들

손 안 더럽히고 살 수 있을까

 

정중동의 말들이

눈꺼풀을 하나씩 닫았다

로또 번호를 굿는다

 

아버지 말대로 수염을 깎았다

위층에서는 화장실 공사가 끝나지 않는다

겹치지 않는 조용한 방식이

이 겨울 어딘가에 있을 거라 믿는다

 

가장 작은 상수가 손끝에 걸린 채

두 칸짜리 혹독한 겨울을 건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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