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작성자문이레|작성시간21.01.22|조회수284 목록 댓글 0

 

번안곡 외 3편   이기리 시인

 

 

 

빈방은 파동

닫으면

더 정확한 울음을 들을 수 있다

 

천장을 바라본다

어디선가 변기 물을 내리고 그릇을 깨고 벽을 친다

 

물을 머금고 웅얼거리는 듯한 대화가 거뭇한 방을 맴돌고

이따금 고함과 비명이 두 귀를 잡아당긴다

 

위에서 들리는 건지 아래에서 들리는 건지 헷갈려서

문고리를 돌리다 말고 바닥에 주저앉는다

 

녹슨 경첩을 보고 있으면

저녁이 창문을 찢고 들어온다

 

벽지는 갈라지는 방식으로 숨겨진 틈을 찾는다

침대와 벽 사이에 끼어 있는 왼팔

누워 있는 것조차 버거울 때

 

안의 소리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동안

먼저 밖으로 빠져나간 소리가

다른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약한 방들이 많고

가까울수록 파장은 커진다

 

밤새 닫아 두었던 문을 열고

밖에 나오니

흰빛에 가까운 뒷모습이 들썩이고 있다

 

 

 

백년해로

 

 

 

물비늘이 바다 한가운데에 모여 길을 이룬다

붙잡고 싶은 시간이 있었지만

부러진 여름의 손톱들로 거기 남아 있고

 

젖은 옷을 모래사장에 펼쳐 두고

물수제비를 뜨는 아이들, 돌은

자신이 닿은 자리마다 몸을 새기고 가라앉는다

 

그늘진 풀밭에서 이끼가 자라나고

어디선가 강아지풀을 꺾어 와

옆으로 누워 있는 나의 뺨을 간지럽히는 당신

 

등대에 불이 켜지고

물속으로 떨어지는 그림자가

사방으로 물방울을 흩뿌렸다가

잔잔한 물결이 되어 돌아간다면

 

저것은 누가 버린 기분일까

 

여유롭고 근사한 날에

이곳의 평화는 한순간에 깨질 것이고

나는 당신과 아이들을 데리고 여길 떠나려다

질퍽거리는 땅에 맨발이 파묻히겠지

 

우리는 발목이 잘린 사람처럼

어디로도 달아날 수 없이

다시 바다를 향해 얼굴을 돌리고

 

수평선은 불안 속에서 몰래 훔쳐보는 실눈처럼

언제나 희미한 순간만을 전부로 알았다

 

당신이 일어나 보라고 나의 왼눈을 벌린다

입속에 과일을 오물거리는 아이들이 발바닥을 긁고 있다

 

가만히 여름이 부서지고 있는 오후

우리가 더 아름답게 지워질 때까지

 

파도가 빛을 집어삼키고 방파제를 향해 달려온다

 

 

 

여름 성경 학교

 

 

 

예배가 끝나면 친구들과 모여 성경 구절을 나누었다

 

그날은 한 구절도 준비하지 못해 모임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 내게 이름도 모르는 친구가 사탕을 주며 웃어 주었다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한목소리로 읽던 날이었다

 

두 바퀴로 달리는 공원이 초록빛으로 가득했고

친구 뒤를 따라 페달을 밟으면

우린 어느새 원을 그리고 있었다

 

새 신발을 신고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손차양을 하며

초대받은 친구 집으로 가는 길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풍경을 어지럽혔다

 

현관문을 열자

옆방에서 어떤 남자아이가 나와

내 잎을 틀어막고 나를 소파에 강제로 눕혔다

 

분명 아무도 없다고 했는데

 

바지가 반쯤 벗겨졌을 때

친구가 다른 방에서 나왔다

구김이 많은 잿빛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집으로 거의 다 돌아와서 본 한쪽 신발 뒤꿈치가 꺾여 있었다

산책이나 하다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마침내 친구 뒤통수를 샤프로 찍었다

 

어느 날 친구는 내 손목을 잡더니

내가 네 손가락 하나 못 자를 것 같아?

커터 칼을 검지 마디에 대고 책상에 바짝 붙였다

 

친구는 나의 손가락을 자르지 못했다

검지에는 칼을 댄 자국이 붉게 남았다

 

내 불알을 잡고 흔들며 웃는 아이들의 모습이 유리문에 비쳤다

 

엎드려 자고 있을 때

뒤로 다가가 포옹을 하는 뒷모습으로

옷깃을 풀고 가슴속으로 뜨거운 우유를 부었다

 

칠판에 떠든 친구들을 적었다

너, 너, 너

야유가 쏟아졌다

지우개에 맞았다

 

불 꺼진 화장실에 오줌을 쌀 때마다 어둠 속에서 어떤 손아귀가 커졌고

천장을 뚫고 들어오는 수십 개의 검지가 이마를 툭툭

 

종례 시간이 끝나도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선생님이 나를 끌어안았다

선생님에게 장래 희망을 말했다

 

저녁을 먹고 혼자 시소를 타면

하늘이 금세 붉어졌고

발끝에서 회전을 멈춘 낡은 공 하나를

두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진흙이 지구처럼 묻은

검은 모서리를 가진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건

세상으로부터 주파수가 맞춰지는 느낌

이제 다른 행성의 노래를 들어도 될까

 

정말 끝날 것 같은 여름

 

구름을 보면

비를 맞는 표정을 지었다

 

 


 

 

올해 김수영 문학상 수상자로 이기리 시인(26·사진)이 선정됐다고 민음사가 16일 전했다.

 

수상작은 시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 외 55편이다.

 

이기리 시인은 1994년 서울에서 태어나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으며 아직 등단하지 않았다. 비등단 작가가 수상한 사례는 김수영 문학상 제정 이래 처음이다.

 

올해 김수영 문학상에는 응모자 191명이 약 1만편의 시를 투고했다. 심사는 김언, 박연준, 유계영 시인이 맡았다.

 

심사위원단은 수상작에 대해 "과거의 상처를 망설임 없이 드러내고 마주하는 용기가 돋보였다"며 "구체적인 장면 속에서 화자의 감정을 과장 없이, 담담하고 정확하게 짚어 내고 있었다"고 평했다. 또 "평이한 듯한 진술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내공과 고유한 정서적 결이 느껴진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주었다"며 "이번 김수영 문학상은 최초로 등단하지 않은 신인 작가가 수상한다는 점에서 더 각별하다"고 덧붙였다.

 

이기리 시인은 "그토록 바라고 바란 순간을 통과했지만 나는 달라지지 않는다"며 "처음 시를 읽었을 때 예뻐지던 어느 한 중학생의 눈빛 그대로 우리의 사랑을 보듬고 싶다"는 수상 소감을 남겼다.

 

 

<심사평>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돌이켜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나’ 사이 행간을 벌려 놓고, 여전히 ‘진행 중인 진실’을 마주하겠다는 태도에 열렬한 응원을 보내고 싶다. 지금 우리에게는 마주볼 용기가 가장 어렵고 가장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계영(시인)

 

“시집 한 권 분량의 원고를 끝까지 읽었을 때, 이상하게도 이 사람을 변호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그가 그리는 시 속 화자는 세상에서 늘 져 온 사람이라고. 세상에서 ‘납작해지느라’ 온 시간을 쓴 사람이라고, 멀끔한 꼴은 아니지만 비범한 구석이 있다고.”

 

-박연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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