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최연홍 문학상 수상작품/ 이경희 시인(워싱톤 디시)

작성자시산맥|작성시간22.04.25|조회수106 목록 댓글 0

가발 장수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아픈 이름 하나가 제가 골라 준 가발을 쓰고서 아주 먼 길을 떠났습니다 정성스레 빗고 빗질한 가발 위에 어린 사과 꽃잎의 핀도 꽂아주었습니다 바짝 마른 꽃의 입술로 버티다 버티다 끝내 상한 몸을 두고 갔으니 더는 아프지 않을 것입니다

 

  불 꺼진 상점 안에서 나는 조금 어두워진 그림자로 앉아있습니다 하나를 사면 하나를 끼워 팔던 흘러간 유행가 같은 가발들 바라봅니다 촘촘한 빗 사이로 걸려 넘어지는 세월의 잔상들, 물결 모양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모두 사라졌을 때 그녀가 쓰고 다니던 눈물로 얼룩진 모자가 긴 목에 짙은 눈썹을 가진 마네킹 위에 씌워져 있습니다

 

  미쳐 잊고 가져가지 못한 부칠 수도 없는 모자의 둘레가 조금씩 마르기 시작하고, 가벼워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녀의 내력을 알 수 없는 그곳에서는 한 개 사면 한 개 공짜를 외치는 철없는 가발 장수가 있겠지만 생각건대 그런 시시한 가발은 그녀에게는 더는 필요치 않을 것입니다 가위며 심심해진 빗이며 핀 따위를 한 자리에 모아놓고 가게 문을 나섭니다 성긴 눈발이 날리고 올해 첫눈입니다

 

 

 

사과꽃이 남긴 말

 

 

 

사과나무 위로 뱀이 기어갑니다

먹이를 물어 나르던 어미 새가 불에 덴 듯

사과나무 주위를 돌며 울부짖습니다

등 붉은 뱀을 경계하라고

나무의 그 지독한 상처 속에

제 목숨이듯

어린 새끼 몇 마리 키우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단풍의 손끝 같은 뱀의 눈이 흔들렸을 뿐

막막... 막막한 고요

나무 곁의 풀꽃이 툭 눈물 떨구었을 뿐

하늘엔 흰구름 여전합니다

 

 

 

어머니

 

 

내가 베어 먹은 어머니의 살

꽃 진 자리보다 아프게 고여있다

 

다디달게 마셔버린 피

십 이문 고무신이

가벼운 보따리에도 비틀거린다

 

더 이상 줄 것 없어

싸리나무 같은 손을 흔들며

내 생을 가져가렴

 

그렇게 동구 밖

한 점 바람으로

 

 

 

손

 

 

한 사람의 손을 기억합니다

차가 신호대기에 걸려 있을 때 

천천히 나무의 이마를 적시며 흘러내리는

노을 그 붉은 나무껍질 같은

어렸을 때 동상으로 쓰리고 아팠으며

지금은 지친 삶으로 고단합니다

한때는 이혼서류에 사인할까 말까 망설였지만

생이 한순간이므로 용서하는 손이기도 합니다

빈 그릇마다 가득 김 오른 음식 퍼담으며

슬픔도 다 제 몫이 있다며 등 두드리던 손

나이테 같은 지문이 다 닳도록

아름다운 일은 아무도 모르게

구부러진 손가락 관절 영 펴질 기미 보이지 않는

햇빛 좋은 오후 잠시 평상에 앉아

졸고 있는 그 손

 

 

 

배꽃 아래 눕다

 

 

나 어느 날 죽게 된다면

배꽃 아래 가 누우리

물결치는 꽃그늘 속

저희끼리 소곤대며 장난치는 모습을 보다가

가장 오래된 상처부터 용서하겠네

 

저 눈부신 배꽃의 이마

한때 나 그런 빛나는 시절이 있어

날마다 조금씩 낡고 딱딱해지는 육체를 믿어

사라지는 것의 두려움을 몰랐네

 

나 배꽃 아래 잠들면

값비싼 수의도 필요 없겠네

한 잎 지는 배꽃

내 눈을 감기고 또 한 잎

두 손을 모으네

가장 멀리 날리는 꽃잎

부고를 전하고 지나는 바람

쓸쓸히 문상을 마치겠네

 

죄 없는 무더기 꽃잎

발끝까지 덮고 나면

나 곧 부드러운 흙이 되겠네

나 곧 향기로운 흙이 되겠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