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시산맥작품상 수상작· 주민현 시인

작성자시산맥|작성시간22.05.27|조회수190 목록 댓글 0

그림 없는 미술관

 

 

아직 전시가 시작되지 않은 미술관을 거닐며

당신과 나는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지구 저편에 있는 그림 없는 미술관에 대한

이야기에 금세 빠져들었어요

 

미술관에 그림이 없다면

무엇이 전시될까요

 

지구에서 동물이 사라진다면

작고 약한 것부터 무릎 꿇리게 될까요

 

그림 없는 미술관을 상상하다가

이 모든 것이 삶에 관한 은유라는 것을 깨닫고

 

밖에 불이 났나 봐요

소방차가 왔으나 아직은 하늘이 거무스름하고

 

나는 창 안에서 개를 안고 있어요

개는 따뜻하고

인간을 맹목적으로 믿는 듯이

 

맹목적인 따뜻함

 

개를 사랑하지만 양을 먹어요

소를 입고요 말은 탑니다

 

인간과 동물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타오르던 하늘이 걷히고

이제 그만 돌아갈게요

 

가볍게 눈 내린 아침에

인공눈물, 인공항문, 인공지능, 그 모든 인공에 대해 생각하다가

 

가볍게 내린 것들은 가짜 같군요

 

역 안에는

구찌 샤넬 루이비통 없는 게 없고 가품에는 표정이 있고

가품은 흥미로워요

 

쉽게 구겨지는 쪽으로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간직하고

 

우리의 자동차, 모피코트, 개들의 움직임

언제나 새들은 가볍게 날아오르고

 

엔진이 꺼진 곳에서 숨 쉬고 있는 작은 동물을 깨워

차를 몰고 도착하는 그곳에서

 

늙은 개는 아주 인간적인 미소를 띠고

 

프레임 없는

뒤바뀐

프레임을 초과하는

부정하는

뒤틀린 그림

아닌 그림 속으로

우리는 천천히 걸어 들어갔어요

 

 

 

 

 

수상소감

 

 

  얼마 전에 간 사울 레이터 사진전에서 유리창이나 빗방울을 이용해 여러 겹으로 겹쳐 흐릿하고 모호하게 찍은 사진들을 보았다. 그 사진들은 풍부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사진 속 연인이나 이웃, 가족들은 아주 익살스럽거나 혼자 있을 때만 짓는 무뚝뚝하고 고독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인간의 삶은 그렇듯 기쁨과 슬픔, 공포와 환희의 표정이 끝없이 번갈아 오는 일 아닐까.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과 안개처럼. 예술가란 한 발 뒤에서 그걸 포착하는 하나의 고독한 렌즈가 되는 일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도 같다. 쓰레기통 옆에, 마네킹 아래, 잔뜩 움츠리고 걷는 행인 뒤에 존재하는.

  그래서 쓴다는 것은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는 게 아니라 뒤에서 서성이고 옆을 더듬거리는 일 같다. 잘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이 없는 날도 많다. 코로나로 인해 더더욱 읽어주는 존재의 자리가 참으로 귀해진 요즈음 이렇게나마 누군가 읽어주고 있다는 응답, 응원을 받는 일은 그래서 더 소중하고 귀하고 감사하다. 「그림 없는 미술관」은 그림이 없는 미술관을 상상하며 쓴 시이다. 인간이라는 것의 프레임, 동물과 인간, 자연 생태계에 대해 많이 생각하는 요즈음이다. 건강하고 윤리적인 삶, 즐겁고 재미있는 글쓰기의 가능성을 계속 고민하고 싶다.

  요즘은 자주 걸어 다닌다. 공사 중인 건물, 문 닫은 상점 따위를 걸으며 본다. 실패의 기록조차도 뜻밖의 우연한 문장으로 남을 수 있기를. 그렇게 매일 조금씩 시 쓰기를 시도한다. 󰡔시산맥󰡕에도, 늘 곁을 지켜주는 켬 동인과 함께 쓰는 모든 친구들에게도 그리고 심사위원 두 분께도 감사드린다.

 

 

 

 

주민현

2017년 한국경제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킬트, 그리고 퀼트>. 창작동인 <켬>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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