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수아이1) /김세영 , 미네르바 2024 봄호

작성자김세영|작성시간24.03.13|조회수47 목록 댓글 0

 

흥수아이1)

                     김세영

 

긴 겨울 동굴, 장작 불빛 속에서

할아비가 아비에게 했듯이,

아비는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멋있는 뿔과 맛있는 고기

거룩한 순록을 따라서

아득한 빙하의 대륙, 설산의 대평원

해 뜨는 동녘을 향해

직립 족속의 끝없는 행군 이야기

 

할아비의 할아비들이

넘어온 흰 산들, 건너온 푸른 강들

밟고 온 풀, 안고 온 흙과 모래들

마음속에 벽화처럼 새겨 놓았다

 

해 돋는 땅의 등뼈,

하늘에 맞닿은 백두와 태백에서

텡그리족2)의 제천 이야기

 

동이의 터전을 하늘에 고하며

창을 들고 들판을 달리던 아비

 

사냥꾼이 되겠다던 아이

사슴을 쫓아 달리다가

풀숲의 독사에게 발목을 물렸다.

 

비명에 달려온 어미,

약초를 짓이겨 발랐다

사지를 움직일 수 없었다

한 모금의 숨도 마시기 힘들었다.

 

겨울강의 고기처럼 왜 이리 차느냐?

삼신할미를 불러서

향불을 피우고 굿을 올렸다.

 

여섯 해를 갓 넘긴 육신을 벗어두고

어미의 따스운 손을 놓고

기어코 한얼의 북극성으로

아이의 혼령이 올라갔다.

 

싸늘해지는 이름을 부둥켜안고

어미의 짐승 같은 울음이

몇 날 며칠, 동굴의 종유석을 흔들었다.

 

우리 아이야, 영특한 아이야, 가여운 아이야!

 

뭐가 그리 급해서 갔느냐?

어미 죽기 전에 다시 보고 싶구나

새로운 몸으로 다시 오너라.

 

세상에서 처음, 너의 육신을 적시던

어미의 몸 물을 다시 뿌려주마.

 

네 가슴 위에 뿌려진

들국화 송이송이, 꽃씨 알알이

향기를 기억하여라.

 

어미의 몸 냄새 맡던 촉촉한 콧등,

우리의 꽃사슴 아이야

벌떡, 다시 일어나거라.

 

들국화처럼 손을 흔들며

샛바람 타고 언덕을 넘어서

다시 오너라.

다시 오너라.

 

 

1) 사만 년 전, 두루봉 동굴에서 살았던 호모 사피엔스 아이

2) 하늘을 관장하는 신을 뜻하는 고대 튀르크어이며, 단군의 어원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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