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서 시인의 첫시집 『야간개장 동물원』(도서출판 달을쏘다) 대표시

작성자시산맥|작성시간24.04.12|조회수29 목록 댓글 0

아메리카노

 

 

 

물결이 만든 음악을 아시나요

 

가난을 감추기 위해 검은 옷을 입고 춤을 추는 에티오피아

 

은밀한 신비감으로 뜨겁게 흔들고 나면

가야 할 원점을 잠시 잃는 도시가 있어요

 

북위 23.5도에서 남위 25.5도까지 햇빛이 꿈틀거려요

커피나무에서 햇볕에 그을린 아이들 손이 자라고

트리니티 대성당엔 아이들이 두 손 모으고 있어요

 

하루를 하루로 풀기 위해 아침을 마시지만

중독은 개기일식처럼 순간의 어둠이에요

수면을 깨뜨리고 길을 내어드린 몸속

되돌아올 수 없는 유일한 통로가

중독의 은신처이니까요

 

커피 속 캄캄하게

숨은 말들이 밖으로 한 모금씩 빠져나오면

그 많던 회오리도 한순간에 침묵하지요

 

복종은 나를 잊어야 완수하는 것

이 어둠의 끝은 쓴맛이 끝난 자리

이른 아침 때론 늦은 오후에 마시면

영혼까지 지배하는 이 힘을 어떻게 아이들은 이해할까요

 

내 안으로 칩거할 수밖에 없는 뜨거운 감정

저항이 없는 두려운 중독을 에티오피아에서 퍼뜨렸을까요

 

까만 어둠만 마셨을 뿐인데 밤새 하얘지는

아침의 기분은 아메리카노입니까

 

두 손이 나무 끝까지 자란 아이들이 잘 지내는지

아침마다 커피로 쓰디쓴 안부를 물어요

 

 

 

 

 

벽 앞에서*

 

 

 

  벽에 찍힌 손바닥은 붉은 비명이다

 

  이곳에서 나갈 수만 있다면, 천천히 시드는 비명, 동여맨 손목들, 실핏줄처럼 아주 느리게 담을 넘고 있다

 

  지문으로는 찾아갈 수 없는, 먼 시대를 떠돌고 있는 언어, 손가락마다 불꽃을 달고 있다 벽을 밀어내고 있는 기원이 종유석처럼 자란다 소리란 다 자라지 않으면 제 안을 더듬거린다

 

  손을 맞대는 것으로 만날 수 있는, 벽은 얼마나 오랜 연대가 시큰거리고 있는 것일까 누군가는 그 손으로 내 등을 두드리고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그저 흘러가는 지문들이었을 뿐

 

  동굴처럼 웅크리고 있는 부족

  손목을 관통하고 있는 터널

 

  말이 비명이 되는 순간 한 손목을 잡고 위로하는 다른 손목을 볼 수도 있지, 손톱이 자라지 않는 손바닥 벽화, 마주 보지 않고서는 손을 맞출 수 없어 여전히 벽을 향해 있다 두 번 다시 접지 않겠다는 맹세를 새긴,

 

  온갖 말들이 들락거리는 관절, 말의 마디는 모두 벙긋거리며 동굴을 지나친 것들이어서 악담과 정담이 함께 생존한다

 

  며칠 악담으로 시큰거리는 내 손목이 붉다

 

 

 

 

 

*스페인 북부 지역의 카스티요 산에 있는 동굴 속 채색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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