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이재연 시인

작성자시산맥|작성시간24.04.19|조회수36 목록 댓글 0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라일락 꽃잎을 뜯어 라일락 시럽을 만드는 동안에도

  라일락꽃은 피어나는데 잠깐 비가 왔습니다

  라일락과 장미와 양파와 자색 가지와 커다란 암탉을 다듬는 여인의 손톱 밑은 검게 변해 있습니다

 

  여인의 손은 크고 공손했습니다

 

  온실을 짓고 스토브를 만들고 선반을 만들었습니다

  제라늄 화분은 선반 위에서 따로 또 같이 놀게 했습니다 마당을 뒹구는 개와 고양이는 서로를 공격했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암탉이 울 때마다 어디서든지 꽃은 꽃을 낳았습니다

  들판을 가르며 흐르는 개울물은 은밀했고 명랑했습니다

 

  시절 없이 핀 야생화를 똑똑 따서 투명주전자에 담은 후

  뜨거운 물을 붓고 잠시 기다리는 동안 부풀어 오른 빵을 뜯으며 생기는 침묵은 잘 발효되어

 

  식사는 단순하고 충분했습니다

 

  초원 위에 흰 연기가 순하게 피어오르는 동안

  농부들은 힘을 합쳐 다시 밀을 거두어들이고

  대지를 가로질러 가는 개울물에 손을 씻었습니다

  긴 목을 뒤로 젖히고 하늘을 길게 올려다본 후 낟가리와 낟가리 사이로 걸음을 옮길 때

 

  자작나무와 함께 겨울이 왔습니다

  뚜벅뚜벅 흰 벌판을 걸어서 그가 오는 동안

  남아 있는 것 외의 것은 다 사라지고

 

  화구 안에서 마른 나무의 목소리가 타닥타닥 서로 부딪치며 타오르고 있습니다

  밖은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고

  흰옷 입은 천사는 나무의 밤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재연

2012년 오장환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쓸쓸함이 아직도 신비로웠다』 『화요일이었고 비는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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