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희 시집 <스위스행 종이비행기> 대표시

작성자시산맥|작성시간24.05.02|조회수21 목록 댓글 0

메모리얼 파크

 

 

 

 

작년의 죽음과 내년의 죽음이

나란나란 나란하구나

 

어린 죽음과 늙은 죽음이

도란도란 도란하구나

 

서로의 사연을 묻지 않으니

여기는 수도원보다 적막하구나

 

꽃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향기는 가만하니

마치 흑백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

 

나비들이 보이지 않으니

지켜지지 않은 약속들을 물을 곳도 없구나

 

무엇을 말해도

여기서는 모두 흙 위에다 쓰는 것

 

잠깐 간절했던 마음은

여기다 두고 갈 일

 

약속도 없이 만났으므로

헤어질 때도 따로 인사는 필요 없을 듯

 

누가 언제 다녀갔다고 기억해도 좋고

기억하지 않아도 좋고

 

 

 

 

 

 

스위스행 종이비행기

 

 

 

아무리 기다려도 스위스행 비행기는 오지를 않고

그는 끝내 스위스에 가지 못할 테지

 

알프스며 몽블랑이 눈에 선해도

그의 관심은 오직 베른뿐

 

베른의 의사들은 실력 있고 친절하지만

그를 오래 기다리지는 못할 테지

 

스위스행 비행기가 오랫동안 오지 않아도

이번만은 누구도 탓할 수 없고

 

그도 문득 알게 되겠지

베른의 날씨가 나빠서거나 공항에 사정이 있어서는 아니라는 걸

 

그러다 차차 지켜볼 테지

오랫동안 묵은 고통이 자신의 몸을 떠나가는 걸

 

베른의 의사를 보지 않고도 그는 마침내 안락을 찾게 되겠지

대성당의 종소리 같은 위로가 겹겹이 그를 에워싸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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