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기의 '수원詩, 수원詩人'] / 박일만 詩「배려」
- 수원일보 / 오피니언 (2026.6.11.일자) -
배려 / 박일만
화분 중심에 천리향을 심은 지 몇 해
나무가 점점 중심에서 밀려났다
산사태로 기슭이 쓸려나간 듯
한쪽 공간이 휑하니 비었다
연유를 몰라 작심하고 살펴보니
그랬구나!
작년에 먹고 버린 감씨가 구석에서 싹을 틔웠다
건사하지 않았는데 저 혼자 몸집 키우고,
옮겨 심으려고 흙을 파내려니 밑이 실하다
뿌리까지 얽히지 않고 한 쪽을 차지했다
천리향은 몸 틔우는 감나무 싹을 내치지 않고
한자리 뚝 떼어준 것이었는데
제 몸을 가장자리로 밀며 옮겨 앉은 것인데
시도 때도 없이 사부작대는 동물들도 영역을 다투느라
오줌 누고 몸 비비며 철조망을 치는데
한갓 발도 없는 나무가 뿌리로 걸어간 것이었다
천리향은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지만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가듯
뿌리로도 천 리까지 향기를 날리고 있었다
어둡고 비좁은 땅속에서 서로 다투지 않고
차라리 나눠 살아내고 있었다
[감상]
지난가을에 발간한 『수원詩人』에 박일만 시인이 발표한 ‘배려’라는 시의 전문이다. 그저 누군가로부터 듣는 일상의 에피소드처럼 읽히는 시이다. 그런데 다 읽고 나면 왠지 가슴 한편이 찔리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시이다.
과연 내가 가진 게 전부 오롯이 내 것일까. 어쩌면 지닌 것이 많다는 것은 누군가로부터 빌린 것이 많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아등바등 더 차지하려 기를 쓴다. 그런 우리네에게 화분 하나가 제대로 깨달음을 준다.
집에 두고 정성을 들인 천리향 화분에 이상이 생겼다. 천리향. 정식명칭은 서향나무이다. 한자의 훈을 풀자면 상서로운 향기를 풍기는 나무라고나 해야 할까. 그 향이 천 리까지 번진다고 하여 정식명칭보다 ‘천리향’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는 익숙하다.
그 화분 가운데 자리 잡은 ‘나무가 점점 중심에서 밀려났다 / 산사태로 기슭이 쓸려나간 듯 / 한쪽 공간이 휑하니 비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작년 가을 먹고 무심코 버린 감씨 하나가 그곳에서 싹을 틔웠다. 그 싹을 위해 천리향은 ‘몸 틔우는 감나무 싹을 내치지 않고 / 한자리 뚝 떼어준 것’이었다.
속된 말로 ‘나와바리’를 군소리 없이 내어준 셈이다. 시인은 ‘한갓 발도 없는 나무가 뿌리로 걸어’ 갔다고 했다. 아하, 그랬구나. 새로 생명의 뿌리를 내리려는 새싹을 위해 뿌리로 걸어가면서까지 자리를 내어 준 것이었구나.
그러면서 시인은 시인 특유의 통찰력으로 꽃뿐만 아니라 ‘뿌리로도 천 리까지 향기를 날리고 있었다’며 그 배려가 지니는 의미를 일깨운다. 당연히 육신의 감각으로 느끼는 향이 아니라 깊은 통찰로 깨닫는 정신의 향기이다.(김준기 수원시인협회 회장)
[박일만 시인]
*2005년 《현대시》로 등단
*<송수권시문학상> ․ <나혜석문학상> 등 수상
*시집 『사람의 무늬』, 『뿌리도 가끔 날고 싶다』,『뼈의 속도』,
『살어리랏다』, 『사랑의 시차』 등
출처 : https://www.suwonilbo.kr/news/articleView.html?idxno=3163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