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란(散亂)
머뭇거리는 십일월의 역
빈 자루처럼 주저앉은 공간은, 어둠이 내려앉을수록 윤곽이 드러나는 조명처럼 묘했다
그녀가 주머니 안쪽에서 낡은 파우더 케이스를 꺼냈다
뚜껑이 열리자
치사량을 넘긴 가루가 공중에 분산되었다
누렇고 마른 층이 포개질수록, 그녀의 얼굴도 지워졌다
입술은 색을 잃었고, 콧등과 숨의 자리는 가볍게 건드려도 부서질 듯 위태로웠다
어두운 구역의 끝에서는
그녀가 한번쯤 입었을 주홍색 슬립 같은 석양이 가라앉고 있었다
한때 그녀를 밀어 올렸던 동력은
뭉친 파우더처럼 뒤엉키다, 살갗 밑에 잔열만 남기고 사라졌다
독이라는 라벨을 읽고도 덧칠해버린 사랑처럼
크리스티나, 벨라, 메어리
그 이름들은 어디쯤에서 부서졌을까
누군가의 사랑이었던 순간이 정말 있었던 걸까
어떤 장면은 막다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창을 통과한 햇살이
부엌 바닥에 사각 그림자를 내려놓았고
, 나는 그 빛의 면으로 그녀에 관한 기억을 부었다
사각 그릇 속 밀가루는
파우더 냄새로 가라앉았고, 반쯤 접힌 그녀의 눈은 반죽 결 사이에서 오래도록 나를 응시했다
창밖에는 힘없는 안개가 한없이 번졌고, 무력한 하늘은 무작정 비어 있었다
예견된 흐름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그게 전부인 것 같았다
(모던포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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