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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변/ 박수현 시인

작성자시산맥|작성시간26.06.19|조회수16 목록 댓글 0

  천변

 

 

  겨울이었어요 천변엔 팔이 잘린 프라타너스들이 지구 한 켠, 어느 전쟁터 포로처럼 줄지어 서 있습니다 눈발이 쉬임없이 내리네요 벗은 나무 가지들 위로 쌓이는 눈은 또 다른 풍경들을 쌓아 올립니다 눈 내리는 풍경 어디쯤 아롱다롱 달아나는 분홍들을 바라보던 봄날이며 자전거 페달 사이로 팽팽하게 감기던 여름 금계국의 노란 웃음이 들어 있겠지요 철새들 날갯짓에 깊어지던 강물을 가을엔 함께 지켜보기도 했지요 애시당초 무슨 다짐 같은 건 하지 않기로, 천변을 다녀간 바람과 구름의 추억 같은 건 입에 올리지 말자고 했던가요 돌아보니 우린 천변 끝까지 함께 가본 적이 없더군요 늘 끝자락 몇 걸음 앞에서 되돌아오고 말았지요 무엇이 두려웠을까요

 

  이제 혼자 천변에 서서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네요 계절의 행로를 다 읽어버린 죄로 추운 겨울을 외투도 없이 견뎌내야 한다는군요. 추위에 떠는 내 심장에 아슴아슴 큰개자리 시리우스별이 들어와 박히네요 저 시린 별빛을 다 건너면 풍경 이후의 풍경들이 언젠가 이른 봄 새싹처럼 움트겠지요 그때 우리 가지 못했던 저 길 끝까지 함께 가 보기로 해요 그곳엔 혹 불친절했던 신이 우릴 반갑게 맞이할지도, 서로에게 보냈던 참 사소한 엽서 같은 풀들이 소복소복 돋아나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 문파 2025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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