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대장간
김인기
몇 마디의 말꼬투리를
뜨거운 불 속에 넣고
달구고 달군 뒤에
두드리고
펴고
자르고
오그리고
그리고 찬 물 속에 팽개치는 담금질이다.
그리고 다시
또 달구고
또 담금질이다.
시인은
말의 대장간에서
작은 종재기 하나 만들어
하늘과 구름
산과 바다
풀잎에 스치는 바람까지도 우겨 담는다.
경남 남해 출생/시 전문지 『풀과 별』 추천(1973)/계간지 『한글문학』 시 천료(1999)/『워싱턴문학』 신인문학상(1996)/National Library of Poetry Contest 입상(1996)/제2회 재외동포문학상 시 입상(2000)/시집 『부끄러워도, 그렇게』(2002).
시인은 언어 대장간의 대장장이
시인들은 보이지 않는 공간 어디쯤 나만의 대장간 하나씩은 잘 지어 놓았을 것이다. 쇠를 불에 달구어 두드리고 펴고 물에 넣었다 꺼내 다시 두드리고 연마하는 것처럼 시인의 대장간에서는 언어를 다루느라 고르고, 두드리고, 깎고, 갈고, 쪼는 소리 한창일 게다.
먼 듯하면서 가깝고 가까운 듯하면서 먼 대장간, 우리 일상에 연결된 것 많음에도 자주 떠오르지 않는, 잘 보이지도 않는 뒤편에서 묵묵히 일하는 곳이기에 잊고 사는 이름이다.
일하자! 일하자! / 망치를 내려쳐라!
베르디 오페라 ‘일 트로바토레’ 중에서 집시들의 노래 ‘대장간의 합창’은 듣고만 있어도 힘이 솟고 정신이 화들짝 깨어나는 것 같다. 대장간은 이렇게 힘찬 곳이다.
아주 어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시골 장터에 간 적 있다. 장터 어딘가에 대장간이 있었다. 불에 달군 쇠붙이를 끌어내 망치로 힘껏 내리치고 패듯이 두드리다 물속에 넣어 지지지-익, 뜨거운 김을 뿜어내면 다시 꺼내 두드리던 너무나 생소한 광경이 무섭기도 하고 가까이 가서는 안 될 것 같은 낯섦에 아버지 뒤로 몸을 숨기던 작은 아이,
망치질하는 대장장이 팔뚝 위로 불끈불끈 솟아나는 억센 힘줄과 근육으로 번득이며 흐르는 땀줄기, 이마에서는 뚝뚝 땀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장면에도 어딘가 알 수 없는 역동적인 풍경이 어린 눈에도 어쩌면 아름답게 비쳐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연마한다는 점에서 대장간의 쇠와 시인의 언어는 무척 닮았다. 담금질하고 이리저리 다듬는 과정이 언어를 다루는 것과 흡사히다. 제목도 ‘시인의 대장간’이다. 시인은 언어를 다루는 사람, 대장간이 필요하다.
김인기 시인에게는 잠언적인 시편들이 더러 있다. 꼭 꼬집어 잠언이라기보다는 시의 어투라든지 흐름이라든지 읽고 나면 은연중 어떤 언어나 행간에라도 경고 한 마디쯤 감춰 놓았을 듯한 여운이 남는다. 그 경고라는 것이 남에게 하는 것이 아닌 주로 자신을 빗대는 듯하지만 묘하게도 너와 나를 향한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하는데 그런 점에서 그는 고도의 스킬을 가진 듯도 하다.
시에 대해 말할 때 그 시가 잠언적인지 따뜻한 시인지 부드러운 시인지 또는 너무 절제적이어서 무섭다든지--등등으로 나눌 수 있다면 그건 시인의 기질이나 품성 또는 사유의 길 등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겠다.
시가 그 시인을 닮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 않을까.
시인이 되기 전 먼저 사람이 되라고 한다. 그래서 좋은 시를 쓰려면 좋은 사람이 되도록 애써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그러나 좋은 사람 되는 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시를 보면 누구의 시인지 대개는 알게 된다. 시는 시인을 닮는 게 당연하기에 어떻게 하면 그 함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어떻게든 좀 다르게 써볼까 고심해도 결국 그 자신이 드러난다. 시에 있어 지극히 어려운 것이 변화 즉 나를 벗는 일일 것이다.
‘시인의 대장간’은 시를 쓴 시인을 똑 닮았다. 시인이 궁금하면 시를 잘 읽어보기를 권한다.
몇 마디의 말꼬투리를
뜨거운 불 속에 넣고
달구고 달군 뒤에
두드리고
펴고
자르고
오그리고
그리고 찬 물 속에 팽개치는 담금질이다.
시인은 지금 말의 대장간에 몇 마디의 말을 올려놓고 담금질하면서 언어를 다루는 과정을 고백하고 있다. 시란 생각나는 대로 쓰는 게 아니라고 딘호하게 꾸짖고 있는 것만 같다. (얼마나 어렵게 쓰는데!)
얼마나 큰 힘을 모아 두드리고 펴고 담금질하기에 대장장이의 온몸에서 구슬 같은 땀방울이 돋겠는가.
그리고 다시
또 달구고
또 담금질이다.
쇠는 뜨거운 불 속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꼭꼭 씹어 일러준다. 시는 그 과정을 퇴고라고 한다. 유명한 시인은 얼마나 퇴고를 많이 할까, 그분들이라고 단번에 시를 완성한다고 생각하면 큰 실수라고 귀띔해드리겠다. 사십여 번씩 퇴고한다는 고백을 들었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시는 그렇듯 어렵게 쓰는 것이다.
시인은
말의 대장간에서
작은 종재기 하나 만들어
하늘과 구름
산과 바다
풀잎에 스치는 바람까지도 우겨 담는다
시인은 말의 대장간에서 두드리고 펴고 자르고 오그리고 찬물에 넣어 담금질해 마침내 하나의 종재기(시)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시 종재기에는 하늘과 구름, 산과 바다, 풀잎에 스치는 바람까지도 모두 담겼다. 이제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닦아주고 시의 종재기를 시원한 그늘에 놓아줄 시간. 대장장이 시인이여,
대장간에서 망치를 내려놓고 잠시 쉬시기를. 수고했다, 수고했다 어깨를 두드려주시기를.
두드리고 펴고 잘라낸 정갈한 시가 땀으로 얼룩진 얼굴을 닦아줄 때 시인은 그제야 웃을 수 있다는 걸, 그 순간을 위해 망치를 내려놓지 못하는 시인을 위해 시가 위로해주는 시간. < 권귀순 시인 >
권귀순 시인
약력
2000년 『펜과 문학』 2회 추천완료로 등단
2006년 가산문학상 시부문 수상
2017년 제2회 윤동주 서시 해외작가상 수상
2020년 제2회 배정웅 문학상 수상
2002년 시집 『오래된 편지』(푸른 사상)
2017년 시집 『백년 만에 오시는 비』(시산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