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넘는 소년
허연
눈 오는 밤. 소년이 산을 넘어간다.
흔한 일이다.
그날 밤 나도 한수이북의 어느 산을 넘었다.
걸음을 옮겨야 했던 게
나의 일이었는지 세상의 일이었는지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어린 내가 얻는 슬픔은
죽은 자의 이름으로 행해진 것들이었고
그래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남았다.
침묵하면 좋은 일이겠지만.
기억 사이사이로 따뜻한 강이 흘러
그것이 눈물인 척하고 있었다.
그렇게 끝없이 세월이 무엇을 가져갔지만
새카맣던 강물은 지금도 흐를 것이다.
어른이 되어 더 슬퍼졌지만
슬픔은 여전히 더 갈 데가 있는 것 같다.
별을 올려다보면 이상하게
슬픔에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산을 넘었던 슬픔이
누군가를 태어나게 할 때 쓰였으면 좋겠다.
슬픔의 비유가 고개를 들 때마다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이 가여워지고
나는 여전히 살아서 산을 넘는 몸을 가지고 있다.
"슬프겠구나"라고 말하면
슬퍼지는 것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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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를 자주 생각해 본다.
그러다가 허연 시인의 「산을 넘는 소년」을 읽으며 .
좋은 시란 어떤 시일까 하는 다른 질문을 함께 떠올렸다
이 시는 좋은 시인가?
「걸음을 옮겨야 했던 게/
나의 일이었는지 세상의 일이었는지」 잘 모르겠는
시인의 고백처럼 정답은 없다.
어떤 이에게는 깊은 울림으로 남을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그저 한 편의 시로 지나갈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시는 좋은 시인지도 모른다.
좋은 시란 독자의 해석을 가두지 않는 시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그 슬픔을 가족으로 읽을 것이고,
누군가는 시대의 상처로 읽을 것이다.
좋은 시란 결국 읽는 이들의 여러 생각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 같은 것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좋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해답도 한번 더 생각하게 된다.
타인의 슬픔과 기쁨,
침묵과 사연까지도 헤아릴 수 있는 사람.
시든, 사람이든 단조로운 것보다는 깊이감이 있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 깊이는 결국 살아온 시간에서 비롯된다.
상처와 기쁨, 실패와 기다림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깊이감은 곧 연륜과도 통한다.
이 시는 슬픔을 단순히 감정으로 소비하지 않고
슬픔이 한 인간의 시간을 통과하며 어떻게 성찰로 변하는지를 보여준다.
오래가는 문장
오래가는 사람
착착 쌓여가는 것들은 아름답다.
오래도록 한 자리를 지켜온 것들이 아름답듯이 말이다.
그래서 결국 사람도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나 역시 시인의 싯구처럼
「내가 산을 넘었던 슬픔이
누군가를 태어나게 할 때 쓰였으면」 좋겠다.
슬픔마저 누군가를 살리는 힘으로 건네질 수 있다면
당신이 그 누구여도
참 좋겠다
<안이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