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 강인한 시집 『입술』
삶의 열매는 한 톨의 씨앗이다
이채민 시인
강인한 시인은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대운동회의 만세소리」가 당선되어 등단하였고, 그 이전에 이미 시집 『이상기후』를 상재한 바 있으니 문단의 윗자리에 넉넉하게 자리 잡음이 편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등단 시 「대운동회의 만세소리」가 예언하듯 표징하는 바 당대의 시대상을 주지적이면서도 깊은 상징을 통해서 비판하는 흐름과, 두 번째 시집 『불꽃』이 보여주는 감각적 서정의 편린은 스승으로 받드는 김수영과 신석정 시인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클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 비판과 개인적 서정을 이지적으로 노래한 강인한 시의 두 축(軸)은 시집 『입술』에도 변함없는 기둥으로 우뚝하다.
‘입술’은 도발적이다. 이성에게 성적 호기심을 일으키기 위해서 인산의 입술은 기능적 진화보다는 치장의 도구로 강조되어 왔다는 동물학자 데스먼드 모리스의 주장이 상기되기 때문일까?
매미 울음소리
붉고 뜨거운 그물을 짠다
먼 하늘로 흘러가는 시간의 강물
저 푸른 강에서 첨벙거리며
물고기들은
성좌를 입에 물고 여기저기 뛰어오르는데
자꾸만 눈이 감긴다
내가 엎질러버린 기억의 어디쯤
흐르다 멈춘 것은
심장에 깊숙이 박힌
미늘,
그 분홍빛 입술이었다.
—「입술」전문
비단을 짜듯 정밀한 시상을 구축하며 유연하게 꼬리를 이어가는 강인한 시인의 시법이 「입술」에서는 투명하고 경쾌함, 동시에 애잔함의 행보를 보여준다. 과감한 의미의 생략과 도약을 통해서 시인이 통달한 삶은 한 번 걸리면 빠지지 않는 미늘, 즉 분홍빛 입술에 작동하는 심장의 살아있음이다.
통달은 달관과는 거리가 있다. 통달은 하나로 꿰뚫음 즉, 일이관지(一以貫之)를 뜻할 때는 달관과 통하지만, 다다르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삶이 고통과 아픔이라는 인식을 버리지 않을 때 달관과는 거리가 멀다. 부연해서 말한다면 ‘살아 있음의 의미’보다는 ‘살아 있음’ 그 자체에 천착하는 시인의 진정성은 기쁨과 슬픔, 긍정과 부정 그 사이에 서 있음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음에 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시간의 흐름과 생명의 쇠럭을 연결하는 미늘은 시인에게는 우주를 호흡하고 빨아들이는 입술이기도 하다. 심장에 박혀 있어 죽음을 앞두고 있으나 시간의 강물은 하늘로 흐르기에 우리를 아프게 꿈을 꾸게 하는 것이다. 살아온 연륜이 두꺼운 시인에게 어찌 삶의 혜안과 깨달음이 없겠는가? 그럼에도 강인한 시인은 안온한 평화보다 쉼 없이 쿵쾅거리는 심장의 아픔에 더 눈길을 주고 있다. 그래서 시집 『입술』은 불꽃과 같이 푸른 에너지가 충만하여 있다.
뜨겁게 데워진 돌벽 위에 손을 내밀었다
담쟁이의 망설임이 허공에서 파문을 만들었다
파란 물살에 문득 누군가의 마음이 걸렸다
능소화였다
먼저 키를 늘이는 담쟁이를 보고
봄부터 여름까지의 거리를 능소화는 헤아려 보았다
담쟁이가 가녀린 허리를 가만히 내주었다
능소화는 담쟁이 허리를 껴안고 기어올라
한 덩어리 파아란 불길이 되어 그들은 타올랐다
사나운 비바람이 담쟁이를 흔들자
능소화도 담쟁이도 함께 흔들렸다
담쟁이는 제 가슴에 붉고 커다란 꽃송이들이 자랑스러웠다
—「능소화를 피운 담쟁이」부분
한평생 꽃을 피우지 못하는 담쟁이와 넝쿨이 없으면 꽃을 피울 수 없는 능소화의 동행은 화엄이며 사랑이다. 사랑의 본질은 혼란을 통과한 후 내 안으로 눈을 돌릴 때 드러나듯이, 담쟁이에게 등을 내어준 담장과 능소화에게 기꺼이 가는 허리를 내어준 담쟁이, 이들의 합일된 사랑은 아기의 살빛만큼 투명하다. 그래서 시 「능소화를 피운 담쟁이」는 우주를 껴안은 눈물겨운 아름다움이 있다.
목이 마르다고 했다
너는 몹시 두려워하며 물을 움켜쥐었다
저 언덕 너머 뒤쫓아오는 추격자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 것 같다
고 너는 말했다
나는 네 손바닥 위에 한 움큼의 물을 보태었다
떨리는 너의 손가락 사이로
물은 금방 새나가는 것이었다
모래언덕 위로 회오리바람이 일었다
한 모금을 겨우 목구멍으로 넘기는 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번개같이
내려진 기요틴의 칼날 아래
눈뜬 채 웃고 있는 내 머리가 뒹굴었다
내 눈에 맺힌
물방울 하나에 너의 모습이 비쳤다.
—「사랑의 기쁨」전문
칼날에 베인 듯 얼얼하고 아프다. 사랑에 빠진 두 남녀는 기요틴의 단두대 즉, 죽음마저 불사한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는 일체의 두려움이 없다. 인간의 이기심과 인성의 파괴로 허울만 너덜거리는 사랑 때문에 상처 입은 영혼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렇듯, 사람도 사랑도 무섭게 변질되어 가는 요즘 시대에 시 「사랑의 기쁨」은 생명의 근원이 되는 사랑에 ‘아름다움’이라는 관념이 단단해지면서 부패되지 않은 한 모금 청정수를 마신 후 눈부심을 확인시켜 주는 작품으로 다가온다.
‘강인한’이라는 필명은 매력적이다.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에 굴복하지 않고 한 평생을 시인으로 강인하게 산다는 것은 어려운 약속일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어쩔 수 없이 들러붙는 타성과 회한이 이름을 더럽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내성이 깃들지 않는 현실 비판과 현실의 질곡을 아파하지 않는 특정을 거부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시는 언어의 보석”이고 “그 속에서 빛나는 것은 시인의 영혼”인 것이다. 세상에 대한 측은지심, 그 어디쯤에서 발원하는 눈물의 힘으로 이 세계를 다독거리고 위로하는 시집이 『입술』이다. 그래서 『입술』에는 강인하게 한평생 갈고 닦은 시인의 외유내강이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다. 이를 증명하듯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능하면 나는 처음 시단에 나서는 열렬한 청년의 자세로 시를 썼습니다. 이 시집에서 나는 청년으로 살고 사랑하였으므로 부디 그 청년을 만날 것을 기대합니다. 오늘 이것이 진정한 내 삶의 얼룩이며 삶의 무늬입니다.”
—「시인의 말」에서
《미네르바》2009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