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도서출판 문예바다 기획의 생애토록 시를 써 오신 우리 문단 유명 시인들의 서정시선집 그 열한 번째로 이건청 시인의 『해 지는 날 푸른 벼랑에 앉아』가 출간됐다.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입상, 1968년 박목월의 추천에 의해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건청 시인은 김소월-정지용-박목월로 이어지는 한국 서정시의 정통을 이으면서 서정의 폭과 깊이를 확장 심화해 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연둣빛 신록의 날들과
폭설의 날들과
폐선廢船의 날들과…
해 지던 날들의
푸른 벼랑을 위하여
― 「시인의 말」
아버지의 등 뒤에 벼랑이 보인다.
아니, 아버지는 안 보이고 벼랑만 보인다.
요즘엔 선연히 보인다.
옛날, 나는 아버지가 산인 줄 알았다.
차령산맥이거나 낭림산맥인 줄 알았다.
장대한 능선들 모두가 아버지인 줄만 알았다.
그때 나는 생각했었다.
푸른 이끼를 스쳐 간
그 산의 물이 흐르고 흘러
바다에 닿는 것이라고,
수평선에 해가 뜨고 하늘도 열리는 것이라고
그때 나는 뒷짐 지고 아버지 뒤를 따라갔었다.
아버지가 아들인 내가 밟아야 할 비탈들을
앞장서 가시면서 당신 몸으로
끌어안아 들이고 있는 걸 몰랐다.
아들의 비탈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까마득한 벼랑으로 쫓기고 계신 걸 나는 몰랐었다.
나 이제 늙은 짐승 되어
힘겨운 벼랑에 서서 뒤돌아보니
뒷짐 지고 내 뒤를 따르는
낯익은 얼굴 하나 보인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쫓기고 쫓겨
까마득한 벼랑으로 접어드는 내 뒤에
또 한 마리 산양이 보인다.
겨우겨우 벼랑 하나 발 딛고 선
내 뒤를 따르는
초식동물 한 마리가 보인다.
― 「산양」 전문
새야
작은 새야
손가락
한 매디만 한 새야
풀씨 몆 개 따 먹은 힘으로
피이 피이
우는 새야
새야
오늘은 내 어깨에
기대서서 울지만
내일엔
누구 가슴 찾아가서
울래.
― 「새야」 전문
붉게 타는 단풍 앞에서
내 말은 한갓 허사虛辭일 뿐
붉은 단풍은 붉은 단풍의 진심을
나이테에 새긴다.
나무들이
단단한 나이테를 새겨 넣듯
나도 말 하나 새기고 싶다.
단단한 말,
둥치째 잘려도 선연한 말,
짙고 치밀한 흔적들이
둥글게 둥글게 입을 다문
그런 말 하나 새기고 싶다.
가을에 나무들은 붉게 물든다.
아름드리나무들이
가랑잎을 떨어뜨려 가는
이 소리 없는 시간의 운행…
그리고 먼 산에 새겨지는 나이테,
이 무량의 침묵 앞에서
나는 말을 잊는다.
― 「산에게」 전문
시를 쓰면서 아프고 멍들고 핏물에 젖기도 했었지만, 나는 직설 토로의 시인이 아니었다. 체험 속으로 되돌아가 멍과 핏물이 내재된 이미저리들을 찾으려 했었다. 과거의 축적 속으로 가 기억의 갈피에 쌓인 시어들을 불러내곤 했었다. 첩첩 쌓인 체험들이 삭아 내린 거기 ‘그리움의 말’이 고여 있었다. 맑고 청신한 옹달샘 같은 말들이었다. ‘이건청의 서정시선’은 그렇게 쓴 시들을 선별해 모아 놓은 시선집이다.
시인으로 살아오면서 쓴 평생의 시편들 속에서 ‘서정시선집’ 한 권을 골라내 따로 지닐 수 있게 되었다. 기쁜 마음이다. 이 ‘서정시선집’이 그리움을 질료로 한 망극한 전언으로 살아남고, 세상이 새롭게 찾아 주는 날이 오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기쁠 것인가….
― 「서정抒情을 향하다」 중에서
시인 소개
- 1967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등단. 현대시 동인
- 시집 『실라캔스를 찾아서』 『곡마단 뒷마당엔 말이 한 마리 있었네』 『굴참나무 숲에서』 『반구대암각화 앞에서』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 등
- 시선집 『해 지는 날의 짐승에게』 『무당벌레가 되고 싶은 시인』 『움직이는 산』 『이건청 문학선집(전 4권)』
- 현대문학상, 한국시협상, 목월문학상, 김달진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고산문학 대상, 녹원문학상 등 수상
-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 한양대 명예교수
차례 | 해지는 날 푸른 벼랑에 앉아
시인의 말
제1부 목마른 물새가 목마른 물새에게
먼 집
목마른 물새
쓸쓸한 폭풍
멍
해 지는 날, 푸른 벼랑에 앉아
내가 네게로
내가 너를 부를 때
봄 언덕엔 언제나
젖고 있는 들판에게
그대의 문
네가 산이었을 때
연초록 숨결 앞에
목마름에 대하여
흙인 나를 밟아 다오
새야
추억
여문 씨앗을 위한 소네트
제2부 사막여우가 있는 풍경
개펄
연초록 새싹에게
찔레꽃 핀 6월의
날개
산에게
사막여우가 있는 풍경
봉함엽서
돌미나리가 있는 풍경
피리어드
부리
한 숲이 한 숲에게
네가 올 때까지
제3부 잠든 염소를 깨워 몰고
산양
별똥별
아내라는 여자
아침 다탁茶卓
봄날
여름 숲에서
노루귀꽃을 보며
선묘
그 말이 아직 망아지였을 때
심해에서 울리는 종소리
벙어리 강
댕기머리물떼새
잠든 염소를 깨워 몰고
치자꽃
선묘, 선묘
기러기
백발의 날
눈길에서
멸치
정직한 시인
제4부 깊은 우물
하류
깊은 우물
봄산
소금창고에서 날아가는 노고지리
청산 가는 길
말
움직이는 산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앞에서
무당벌레가 되고 싶은 시인
간이역에서
젊음에게
광막한 바다가
폭설
침묵하는 산
애련愛憐
탁. 탁. 탁.
소금 사막
봄밤의 꿈
말들의 시간
가을 바다
봉선화
사북에서
코뿔소를 찾아서 -추운 사내
저무는 날이 다가와
은어
황야의 이리・2
연꽃 밭에서
서정抒情을 향하다 ∙ 두 개의 유년 체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