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가본 길
김 명 규
어린애 달래듯하였다. 때로는 독설로 윽박질러도 보았다. 그러나 주저앉아버린 황소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숙제를 하지 않고 노는 초등학생 같아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테이블 위에 널브러져 있는 그것들을 내동댕이쳐 버리고 싶었다.
남편은 명예퇴직을 서두르고 있었다. 정년이 두 해나 남아있는데 퇴직을 하겠다니 마음이 착잡하고 부담스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내 심중을 눈치 챈 그는 퇴직하고 어려서부터 하고 싶었던 그림을 그려보겠다며 나를 위로하였다. 남편은 37년 간 몸담았던 교직을 청산하고, 고달픈 교단에 미련이 없다며 훈장을 들고 돌아왔다.
다음날, 나는 서둘러 화방을 찾아 나섰다. 나이가 나이인 만큼 놓아버렸던 그림을 이제 시작하려면 하루가 급하다는 마음에서였다. 아이들 기뻐하는 운동회 때나 소풍가는 날을 위해 엄마가 맛난 것을 사러 시장에 가듯 내 기분은 풍선처럼 떠올랐다. 유화보다는 수채화를 그리겠다고 한다. 시내버스 유리창에 아름다운 색감이 번져 나갔다. 새로운 꿈 새로운 도전, 그것은 미각을 깨우는 신선한 드레싱 소스처럼 감칠맛을 돋우었다. 화가의 아내, 남편의 개인전, 앞으로 다가올 일들이 화려하고 고상한 품위로 내 미래를 치장해 줄 것 만 같았다.
여느 화가의 화실 같지는 않지만, 방 하나를 치우고 스케치북과 물감을 늘어놓고 그림을 그릴 만한 널찍한 테이블도 구입해 놓았다. 그러나 일주일 이주일 한 달이 되어도 남편은 인터넷 바둑 게임에만 빠져들어 갔다. 미술도구 위에는 먼지만 쌓여갔다.
오늘이나 내일에나 그 방으로 들어갈까 눈치를 보았지만 눈만 뜨면 컴퓨터 속으로 파고들었다. 끼니마다 차려놓은 밥이 식어빠질 때까지 먹지 않아 성화에 지친 나는 혼자 먹기 일쑤였다. 자식 같으면 닥치는 대로 때리면서 분을 풀었을 것이다,
감언이설로 나를 속였다는 분한 생각이 치솟아 오르기 시작하였다. 딱 딱 딱, 바둑알 놓는 소리도 나에겐 공해였다. 오늘도 여전히 바둑알과 실랑이를 하고 있는 남편의 등 뒤로 다가섰다. 애써 감정을 짓눌렀다 치지만 내게서 말씨가 곱게 나올 리 만무했다.
“도대체 그림은 그릴 거여 말 거여? 물감이랑 모조리 내다버릴 테니까, 남은 세상 바둑이나 두다가 죽든지 말든지 해욧!”
“아따 나 좀 쉬게 하소, 당신이 좀 그려보든지“
이러는 것이었다. 그는 바둑을 두려고 명퇴를 한 사람이 틀림없었다. 우렁이처럼 박혀 앉아 자기를 찾아온 손님이 와도 나에게 말상대를 맡긴 채 돌아앉아 바둑판만 보고 있었다. 날이면 날마다 나는 부아가 끓어올랐다.
재능이란 신의 선물인가, 축복인가. 나는 그림 그리는 재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 사람이다. 그러기에 내가 가장 존경하고 부러운 사람이 화가다. 남편과 처음 만나 데이트를 할 적에 그는 언젠가 꼭 화가가 되고 싶다는 말에 나는 결혼을 결심한 것도 사실이다. 온 집안을 갤러리처럼 꾸미고 살았으면 싶었다. 미술품을 갈망하고 여유만 생기면 사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 형편에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수백 수천씩 하는 그것들을 만져볼 수도 없었다. 그런데 남편이 뒤늦게나마 내 욕망을 채워 주리라 믿어 얼마나 기뻤던가.
퇴직하고 일 년이 지난 뒤, 그림에 대하여는 나도 마음을 덮었다. 장롱 위에 깊숙이 수채화 도구를 밀쳐둔 지 오래였다. 어느 날 남편이 그것들을 꺼내어 펼쳐들었다. 겨우 삼사십 분씩 데생을 하다 말고 담배를 물거나 다시 바둑을 두는 것이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 이라는 시가 생각난다. 두 갈래의 갈림길에서 한 길을 선택해야 했을 때, 남은 길에 대한 것은 미지의의 세계로 남겨 두었지만 끝내 그 길을 못 가고 인생의 판도가 바뀌고 말았다는 내용의 시가. 어쩌면 남편도 못 갔던 길에 대한 애착을 일생 동안 버릴 수 없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갖고 싶은 것은 기필코 얻어야 만하는 내 집착에, 그도 못 견디고 이년 동안 일곱 점의 수채화를 그려내었다. 그림을 그리게 하기 위한 내 정성과 노고도 어찌 일일이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작가들의 그림 값이 왜 비싸야 하는가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던 기회였다. 모든 예술가가 그러하듯이 혼을 불어넣지 않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녕 예술가들이야말로 신의 선택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싶다.
남편의 수채화가 미술관에 걸려있는 작품처럼 수려하지 않지마는 우리 집 곳곳에는 어설픈 추억처럼 걸려 있다. 그의 손을 빌려, 사실은 내 입으로 그린 그것들이. 비록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인터넷 검색에서 꺼내어 모작하였지만 나는 원화 못지않은 감상에 젖곤 한다. 그림의 구석에 찍은 빨간 낙관이 나를 보고 선명하게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