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Il Pleut Sur Santiago)
1973년 9월 11일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 비가 내렸다. 칠레 군부의 실력자 피노체트(Augusto Pinochet Ugarte)가 국민의 투표로 선출한 민선 대통령인 아옌데를 축출하기 위해 불러들인 <비>였다.
영화의 시작은 이렇다. 맑은 아침에 젊은이들이 오픈카를 타고 라디오의 신 나는 음악을 들으며 들판 길을 달리고 있다. 음악이 끝나자 라디오의 DJ는 아무런 설명 없이 “지금 산티아고엔 비가 내립니다”라는 멘트를 전한다. 청년들은 DJ의 황당한 멘트에 서로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함께 웃으면서 도로를 달린다. 잠시 뒤 그 길 위로 탱크들이 요란한 굉음을 내며 달려간다.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피노체트 쿠데타군의 암호이자 작전명령으로 칠레에 내린 재앙의 비였다.
간략하게나마 칠레를 살펴보자. 칠레의 국토는 남과 북 총연장 4,300Km로 세계에서 가장 긴 나라다. 면적은 남북한을 합친 3.5배 크기의 75만 6,096㎢이지만 인구는 1,500만으로 남북한 총인구의 1/5 밖에 되지 않는다. 특히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는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로 연중 300일 이상 맑은 날이 이어진다. 비가 적게 오는데도 농산물은 풍부하고 품질이 좋은 이유는 성장에 적당한 일조량과 함께 넉넉한 물 때문이다. 안데스산맥에서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물은 ‘산에 물을 뿌려가며 나무를 키울 수 있을 정도’이다.
칠레는 우리나라보다 민주주의 수립의 역사가 더 오래된 나라이다. 일찍이 칠레의 인디오들은 마야(Maya)문명과 아스테카(Aztec)문명 그리고 잉카(Inca)문명을 찬란하게 꽃피운 일원이었다. 1536년 스페인의 침략으로 식민시대가 시작되어 18세기까지 총독에 의해 지배가 계속되었다.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19세기에 독립 기운이 태동하였으며, 1810년 9월 산티아고 시의회가 자치 정부의 수립을 선포한 후 국민의회를 구성하면서 독립이 시작되었다.
예술활동이 활발하고 특히, 칠레의 문학은 남미의 최고봉으로 꼽혀 “시인의 나라"로 불린다. 이 같은 명성에 걸맞게 1945년에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Gabriela Mistral), 1971년에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 (Pablo Neruda)가 각기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은 남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영화는 칠레 대통령 아옌데(Salvador Allende Gossens)를 주인공으로 한다. 그는 1970년 대선에서 민주연합당(Unidad Popular)의 후보로 출마하여 세계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권을 출범시켰다.
중남미에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고 했던 아옌데와 체 게바라는 둘 다 의사출신이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체 게바라는 무력에 의한 급진적 혁명을, 아옌데는 선거라는 합법적인 방식을 통해 사회주의를 건설하고자 했다. 그러기에 게바라가 중남미의 산악지대를 누비며 혁명의 토대를 일구어냈다면 아옌데는 자신의 조국 칠레에서 30여 년간 의회 정치인으로 활동을 해왔다. 그래서 게바라는 자신의 저서 <게릴라전>을 선물하면서 "다른 방법을 통해 같은 결과를 성취하고자 노력하는 살바도르 아옌데에게 동지애를 가지고"라는 증정사를 적었다고 한다.
개혁 노선이 민중의 지지를 받기는 했지만, 아옌데가 처한 정치적 환경은 나빴다. 아옌데가 실현하고자 하는 정책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그가 당선된 36.6%의 소수파로서의 한계를 극복해야 했다. 야당은 사사건건 아옌데가 추구하고자 하는 개혁에 사력을 다해 저항했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고 했다. 기득권층으로부터는 양보를, 서민들로부터는 인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또한, 기존의 질서 위에 새로운 질서를 덧씌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개혁은 혁명보다 도덕적 우위에 선다. 폭력을 수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좌파 정권의 등장으로 민중들의 다양한 요구가 한꺼번에 분출하면서 거리는 연일 시위대로 메워졌다. 아옌데의 실질적 기반이었던 이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아옌데는 요구를 들어 줄 수도 진압할 수도 없는 진퇴양난 속으로 빠져들었다. 게다가 극좌와 극우 사이의 갈등은 점차 폭력으로 치닫고 있었다.
분노를 생산하는 저들로부터 민중을 분리를 시키지 못한다면 개혁은 물 건너 갈 뿐 아니라 아옌데 정권의 존립기반마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개혁을 이루고자 했지만, 그에게 주어진 정치적 시간은 짧았다. 그가 실시하는 자본의 재분배와 구조적 모순을 척결하기 위한 개혁의 성장통을 사회불안으로 읽으며 정권탈취의 기회를 엿보고 있는 군부세력이었고 미국은 중남미에 부는 사회주의 도미노를 막기 위해 군부를 적극 지원했다.
미국의 CIA가 중심에 섰다. 미국은 칠레에 대한 차관제공을 중단하는 한편 칠레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수구 기득권층을 지원해 힘을 실어 주었다. 또한, 불법 파업과 시위를 주동하게 했는데 노동자들 속에는 CIA 요원들이 침투해 있었다.
1973년 9월 10일 밤 아옌데는 국방장관으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칠레 해군과 미 전함들이 발파라이소에 집결했고 육, 해, 공군과 경찰은 군사평의회를 구성한 후 의장에 피노체트 육군 최고사령관을 선출했다는 보고였다.
1973년 9월 11일 아침 7시 30분, 아옌데는 쿠데타가 발발한다며 출근을 저지하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아옌데는 오로지 대통령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기 위해 모네다 궁으로 향했다. 시내 외곽 산자락에 있는 청와대와는 달리 모네다 궁이라고 불리는 대통령관저는 산티아고 시내 중심가에 자리 잡고 있다..
예정대로 피노체트의 쿠데타군이 몰려 들어왔다. 국가에 대한 일격이라는 뜻의 불어 쿠데타(coup d’Etat)는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아는 단어이다. 쿠데타군은 아옌데에게 망명허가를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칠레 국민은 아직 점령당하지 않은 유일한 국영방송 마가야네스 라디오 방송과의 전화 연결을 통해 아옌데의 마지막 연설을 들었다.
저는 목숨을 걸고 이 나라의 고귀한 원칙을 지켜내겠습니다. 약속을 저버린 채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지 않으며 군부의 정통을 무너뜨린 자들에게 불명예가 쏟아질 것입니다. (중략)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무력이나 범죄행위로는 사회변혁을 멈추게 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며 인민이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자유롭게 걷고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역사의 큰길을 인민의 손으로 열게 될 것입니다.
연설이 끝난 후 아옌데와 함께 사회주의의 꿈을 이루고자 했던 이들은 총을 들었다. 모네다 궁에서 넥타이를 맨 정장차림으로 소총을 들었지만 그 소총으로 탱크와 폭격기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80년 민주화의 상징이었던 전남 도청을 사수하고자 꽃잎처럼 쓰러져간 우리들의 민주 영령들처럼. 이 전투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확정된 죽음’의 전투였다. 그러나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한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맞서 싸우다 희생 당한 광주시민이 민주주의의 순교자로서, 광주는 민주화 운동의 성지로서 부활하였듯 그리 멀지도 않은 가까운 미래에 이 들의 죽음은 칠레의 민주주의를 부활 시키고 비단 칠레 국민뿐 아니라 온 인류에게 자유와 정의를 지키는 빛나는 유산으로 승화된다.
한편, 쿠데타군은 아옌데 정부를 지지하는 시민들을 연행하여 에스타디오(Estadio) 스타디움 관람석 가득히 집결 시켰다. 이들 시민의 대다수는 학생들과 진보 정당인사들과 예술가 등 지식인들이었다. 불법 연행된 이들은 두 팔을 올려 머리 뒤에 깍지를 낀 채 스타디움에 드리운 거대한 공포 속에 떨고 있었다. 스타디움 한편에서는 연행자의 신원확인과 함께 분류 작업이 진행되었다. 사회주의의 성향 정도와 조직 내의 중요도에 따라 저들이 마련해 놓은 다양한 형극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야 할 참이다. 이때 덥수룩한 머리의 젊은이 하나가 스타디움을 짓누르고 있는 주검 같은 공포를 깨고 힘찬 구호와 함께 노래를 부른다.
Venceremos (우리는 승리하리라) Venceremos (우리는 승리하리라)
‘벤세레모스’는 1970년 대통령 선거에서 부르던 인민연합찬가. 공포의 스타디움에서 이 노래를 부른 이는 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on)의 기수 빅토르 하라(Victor Lidio Jara Martinez). 그는 이 노래를 부르다 군인들의 무자비한 폭력에 희생된다.
이 세상에 어쩔 수 없는 쿠데타, 최선의 쿠데타란 없다. 오직 민중에 의한 혁명만이 정당할 뿐!
1974년 12월 11일, 군사평의회 의장 피노체트를 수장으로 한 군부독재 17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독재권력의 철권통치로 공범자 소수에게는 화려한 만찬이었지만 국민에게는 고통과 절망의 시간이었다. 군정시절 (1973-1990) 동안 피노체트가 만든 ‘죽음의 특공대’ 등 군경 정보기관에 납치돼 희생된 이들은 대략 13만 명으로 추정하며 이 가운데 3만 명은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독재의 트라우마는 내면화되어 시민은 아직도 밀고 관행에 대한 공포로 남을 신뢰하지 못하며, 잘못하더라도 좀처럼 이를 시인하지 않는 습성을 지니게 되었다고 한다.
1989년 12월 11일. 민주야당연합 공동후보인 아일윈(Patricio Aylwin Azócar) 후보가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7년 피노체트 군정이 종식되는 순간이었다.
인류의 양심은 시퍼렇게 살아 있었고 정의의 심판은 명쾌했다. 늙은 독재자의 말로는 비루했다. 피노체트는 국제적으로는 인간 도살자라는 치욕스러운 단죄를 받았고, 국내적으로는 고문 피해자와 실종자 가족들에게 고소를 당해 각종 법률적 제재를 받던 중 2006년 12월 11일, 아직 끝나지 않은 반인륜범죄 재판을 뒤로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역사는 희망을 준다. 불과 30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아옌데는 부활했다. 2001년 대통령관저 뒤편 광장에 아옌데의 동상이 세워졌다. “나는 칠레가 가야 할 길, 칠레의 미래를 확신한다.” 라는 비문과 함께. 또한, 수많은 민주 투사들이 목숨을 앗아간 ‘에스타디오 스타디움’은 2003년 칠레의 민주화와 함께 민중 가수 ‘빅토르 하라’를 기념해 ‘빅토르 하라 스타디움’으로 명명했다.
알베르트 카뮈는 ‘정의는 기억을 바탕으로 세워진다’고 했다. 군부에 맞서 싸운 빛나는 영혼에 대한 기억이 결국 칠레 민주주의를 부활시키고 인류에게 자유와 정의의 유산으로 승화되었다고 영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칠레라는 생소하기만 한 나라에서 1975년에 일어난 군사 쿠데타를 소재로 한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무려 10년이 훨씬 넘는 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즉 유신독재자
이 영화는 1989년 한 해가 저물어 가는 12월 30일에 공영방송인 KBS의 <토요명화> 시간에 방송되었다. 그 당시의 언론은 사회적 공기이라고 일컫는 언론을 출세의 발판으로 여긴 정치 모리배들에 의해 언론으로서의 사명을 포기한지 오래였고 단지 정권의 시녀로서 기능할 뿐이었다. 이러한 공영방송에 대한 국민의 분노는 ‘시청료 거부운동’을 통해 격렬히 표현되고 있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방송된 이 영화는 방송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으로써 뿐 아니라, 언론이 국민에게 쓴 반성문이기도 했다.
1975년에 헬비오 소토(Helvio Soto)감독이 다큐멘터리적 구성을 빌어 연출한 영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 (Il Pleut Sur Santiago)는 칠레 군부와 기득권층과 미국이 결탁하여 감행한 쿠데타를 다큐멘터리적 구성을 빌어 그린 프랑스와 불가리아와의 합작영화다.
남돈우(南敦祐)/영화제작자
월간 시사아트앤씨 기획편집위원장
(현) 씨드윈 미디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