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명 시집『마치』
마치 (외 4편)
이수명
내 마음이 죽은 잎들을 뒤집어쓰고
마치
죽은 잎들이 서 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구나 꿈속에서 처음 보는 접시를 닦고 있구나 접시를 아무리 가지런히 놓아도
마치
죽은 잎들이 땅을 덮으리
죽은 잎들이 땅을 온통 덮으리
그러면 실시간
그러면 거리에는
마치
어디서부터 온 건지 알 수 없는 알록달록한 숄들이 늘어서고
숄을 걸친 어깨들이
마치
다른 요일로 건너가고 있구나
다른 입김을 내뿜으며 돌아다니고 있구나
마치
흘러넘치듯이
끝없이 부풀어 오르듯이
그러면 나는 마치 꿈꾸고 난 후처럼
하얀 양들을 보러 가요
양 떼들이 별안간 걸어 나오는 것을 보러 가요
마치
여기를 묻어버려요
여기가 떠내려가요
내 마음이 죽은 잎들을 뒤집어쓰고
죽은 잎들이 땅을 덮으리
죽은 잎들이 땅을 온통 덮으리
마치
꿈꾸고 난 후처럼
시멘트 야채 종이 같은 것들
한 사나이가 들판을 달리고 들판을 달리는 사나이가 들판이 꺼진다. 사나이에게로 꺼진 들판이 없는 사나이가 달린다. 시멘트 야채 종이 같은 것들이 고온다습해서 그는 무턱대고 배추를 뽑는다. 배추를 들고 걸어가는 사나이가 들판이 뚫려 있다.
들판을 빠져나가는 쥐들이 빠져나가기에 들판이 불편하다.
한 사나이가 들판을 달리고 들판이 뚜껑이 없어서 들판의 시대는 사나이를 닫는다. 들판을 닫는다. 들판을 달리고 있는 사나이가 들판을 끌고 온다. 들판은 늘어나는 사용이다. 사나이는 사나이에게로 밀려난다. 시멘트 야채 종이 같은 것들을 끄집어낸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겨진 신발 속으로 들어가다 말고 원인들은 무사히 지냅니까. 시체들이 바스락대는 날들입니다. 뼈가 어긋나고 더 멀리 방사상으로 팔을 벌린다. 싹이 나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무엇 하나 뱉어내지 못하고 한꺼번에 삼켰거든요.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삼키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패잔. 조심성 없이 이유가 모여 있습니까. 내 생각을 물을 때마다 내 생각이 가능해질 것이다. 가능이 모여 신음할 것이다. 마침내 얼굴을 뒤덮어버리는 똑같은 입김
4차선 도로
4차선 도로는 전염병처럼 번진다. 눈앞에서 번진다. 햇살을 받아 내내 번들거린다. 4차선 도로에는 짧은 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있고 팻말을 세우는 사람 팻말과 얼어붙은 사람 다리 사이로 타르가 흘러내린다. 4차선 도로는 뻗어 나가고 먼저 가 했던 것 같고 가지 마 했던 것 같고
도로가 완전히 퍼져 나가면 도로를 막고 서 있으렴
4차선 도로에는 지붕 달린 차들이 달리고 간혹 지붕이 떨어져 내리고 지붕을 주우러 들어갔다가 지붕을 버리라 4차선 도로는 무슨 도가니에 빠져 있다. 동서로 미친 듯이 가보려 한다. 동서인 채로 가만있으려 한다. 흥분하여 굳어 있다. 4차선 도로에는 휘발유 냄새가 가득하다. 이대로 통째로 증발해버리렴
실려 있는 것들을 지상의 모든 운반을
내려놓으려 하고
너의 모습
너의 모습을 보여줘
너는 웃는 모습이다. 웃을 작정이다. 너는 어디서 왔니
물어보아도 웃고
웃음을 어떻게 던지는 거지
불안이 시작될 때
불안은 너의 명랑
천장은 높고 천장에서 뛰어내리며 너는 웃는다. 아무도 모르는 날들이 거기 있는 것 같다. 너는 날들을 퍼뜨린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벽을 따라다니며 나도 날들을 하고 있을게
모습들이여 단결하라
뛰어다니는 모습
아마도
지푸라기가 걸어오는 것처럼 보일거야
지푸라기가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일거야
오늘 내 모습이 좋다. 모습이 나와 함께 있어서 좋다.
너의 모습을 보여줘 너는
풍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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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3월. 행진. 망치.
그리고
Als Ob
2014년 4월
이수명
—시집『마치』(2014)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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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명 / 1965년 서울 출생. 서울대 국문과와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4년《작가세계》로 등단. 시집『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왜가리는 왜가리 놀이를 한다』『붉은 담장의 커브』『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마치』, 연구서『김구용과 한국 현대시』, 시론집『횡단』, 번역서『낭만주의』『라캉』『데리다』『조이스』등.
‘이유가 무엇입니까’라는 물음 뒤로 따르는 이유 없는 대답
증식하는 기호들, 증발하는 의미들
증식하는 기호들로 의미를 확산하고 동시에 의미를 증발시키는 자신만의 시(‘이수명의 시’)를 만들어온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이다. 갑자기 솟아오른 듯하지만 고요하고 고독하게 응시하는 시법으로 탄생한 그의 시어들은 아무런 굉음 없이 충돌한다. 자연수가 관념과 만나고 건축은 살아 숨을 쉬며, 주어가 예상치 못한 동사를 만나 벌이는 말의 과잉과 말의 한계가 드러나는 지점은 시가 아닌 다른 무엇일 수 없다. 어떤 “믿음 위에 우선 눕”게 되는 우리가 “똑같은 날들을” 바닥에 털어내고 “분별을 모두 잃”게 되는 그때 오롯이 시적인 순간 시적인 삶이 그려진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옳은 것처럼 보였다”(「여러 차례」)라는 시어는 그의 시들을 반증한다. 시인은 누구보다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아니 옳은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권혁웅은 이수명의 시를 가리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도 시는 더한 역량을 발휘한다”고 말한다. 이번 시집은 말로서 번식하는 의미들이 아닌 빠져나가고 미끄러져 나가는 말의 속성과 시적 역량을 다시 한 번 유감없이 발휘한다. “시는 멈추지 않는다.”
시에는 시 자체의 역량이 있으며, 이것이 불변자 곧 변치 않는 자질이 되어야 한다. 이수명은 오랫동안 이 역량을 믿어왔고 탐색해왔다. 이수명의 시가 소개하는 이상한 시공간은 바로 이 불변하는 시의 역량에서 도출되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이수명에게 고유한 시작법이란 없다. 각각의 시들이 해설이 담당할 말들을 설명이 아닌 방식으로 되돌려놓았다. 숨은 것은, 아니 숨겨진 것은 없다. 전부 숨은 채로 드러나 있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이해해도 시는 더한 역량을 발휘한다. 시 자체의 역량이 불변하기 때문이다. 시는 멈추지 않는다._권혁웅(문학평론가)
로스트 룸 ― 거룩한 ‘있음’을 집어삼키고 사라지는 ‘있음’을 거머쥐는 공간 어떤 방도 열 수 있는 ‘마스터 키’가 하나 있다. 그 열쇠로 문을 열면 항상 같은 방이 나온다. 그 방은 공기의 흐름도 정지된 듯 고요한 방이다. 어떤 물건이든 그 안에 던져 넣고 문을 닫았다가 다시 열면 물건은 사라지고 방은 말끔히 정리되어 있다. ‘리셋’이다. 그리고 그 방을 통과해 반대편 출구로 나오면 낯선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고요하지만 엄청난 힘을 가진 이 방을 이수명의 시에 비유하면 어떨까. 백지, 제로 베이스, 무(無)의 세계에서 솟아오르고 전율하는 시들. “들판을 달리고 있는 사나이가 들판을 들고 온다. 들판은 늘어나는 사용이다. 사나이는 사나이에게로 밀려난다. 시멘트 야채 종이 같은 것들을 끄집어낸다”(「시멘트 야채 종이 같은 것들」). 이렇게 시작되는 시집은 한 편의 시 안에서도 일인칭이었다가 이인칭이었다가 삼인칭으로 바뀌며, 고백형이었다가 서술형이었다가 명령형으로 바뀐다. 먼저 가 했던 것 같고 가지 마 했던 것 같고
도로가 완전히 퍼져 나가면 도로를 막고 서 있으렴
[……]
실려 있는 것들을 지상의 모든 운반을 내려놓으라 하고 (「4차선 도로」 부분)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겨진 신발 속으로 들어가다 말고 원인들은 무사히 지냅니까, 시체들이 바스락대는 날들입니다. 뼈가 어긋나고 더 멀리 방사상으로 팔을 벌린다. 싹이 나는 것은 쓸쓸한 일이다. 무엇 하나 뱉어내지 못하고 한꺼번에 삼켰거든요. 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삼키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패잔, 조심성 없이 이유가 모여 있습니까, 내 생각을 물을 때마다 내 생각이 가능해질 것이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부분)
“이유가 무엇입니까”라는 독자를 대변하는 듯한 이 물음에 “내 생각을 물을 때마다 내 생각이 가능해질 것이다”라고 답하는, 전능한 시의 가능, 시의 놀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세상에서 “나는 아무것도 일깨우지 않”으며 “두리번거리지 두리번거림에는 인기척이 없어 나는 인기척을 소란스럽게 만들어봅니다”. 이것이 이수명의 시가 사라지고 시작되는 지점이다.
마치, 꿈꾸는 것처럼 ― 무엇과도 연결될 수 있는 언어의 능력, 무엇으로든 변환되는 언어의 무력 “종이 한 장에 쓰인 시가 한 줌의 질량으로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발휘하”는 시의 우주를 체험한 어떤 사람이라도 결정 불가능하며, 해석적 순환이 멈추지 않는 이수명의 시가 만들어내는 에너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수명의 모든 시어들은 “산출자이자 전환자”로 그 자신이 사물이면서 사물을 낳는 계기가 된다. 문학평론가 권혁웅의 말처럼 “입자와 파동을 자유롭게 오가는 빛의 역량처럼, 시 역시 계기와 사물을 자유롭게 오가면서 시간과 공간, 감정과 동작 모두를 시적 역량의 표현으로 만든다”. 어떤 것에도 가 닿을 수 있는 힘으로 무장한 저 직유의 수사 ‘마치’는 또한 마치 행진march하는 병정들처럼 시에 박동을 불어넣는다. 모든 것이 가능해진다. 마치 꿈꾸는 것처럼.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구나 꿈속에서 처음 보는 접시를 닦고 있구나 접시를 아무리 가지런히 놓아도 마치 죽은 잎들이 땅을 덮으리 죽은 잎들이 땅을 온통 덮으리 그러면 실시간 그러면 거리에는 마치(「마치」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