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황제 宋나라 휘종(徽宗)에 대하여
1126년 중원에 일대 격변이 일어났다.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송나라를 강남까지 밀어내고, 당시 송을 다스리던 흠종과 그의 아비인 휘종을 포로로 잡아간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흠종의 연호가 정강이라 이 사건을 정강의변(靖康之變)이라 부른다.
송나라는 당나라 말기 절도사의 난립을 보고 무를 억제하고 문을 숭상하는 정책을 펼쳤다. 이로 인해 송의 국방력은 취약해져 거란과 서하의 침략에 시달렸다. 결국 송은 거란과 서하에 은, 비단, 차를 비롯한 막대한 세폐를 바침으로써 그들의 침략을 방지하였다. 이로 인해 송의 재정은 나날이 갈수록 피폐해지고, 그 타개책으로 왕안석의 개혁을 통해 수많은 개혁정치를 실행하였지만, 보수파 관료들의 반발에 부딪혀 투쟁이 격화되고, 피폐한 농민들에 의해 방랍의 난 같은 농민의 반란이 잇달았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8대 황제 휘종은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그는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일에 소질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정치는 채경, 동관과 같은 간신배에게 맡기고 자기 자신은 서화나 골동품에 심취하거나 미녀의 품에 안기는 등 '풍류천자'의 생활을 하였다. 황제가 정치에 손을 떼자 간신배들이 득세하여 백성들을 마구 착취하였다. 이로 인해 송의 국력은 탕진되었고, 정치와 경제 재정 상태는 빈사 직전이 되었다.
이 때 동북 만주에서는 대영웅이 출현했다. 여진족을 통합한 아골타는 1115년 독립을 선언하며 금을 건국, 요나라에 대해 공세를 취했다. 이에 송 조정은 해상에서 금에게 요에 바치던 세폐 전액을 바칠 테니 함께 협공하여 과거 중원의 영토였던 연운 16주는 송이 차지하기로 금과 맹약을 맺고 거란의 요를 협공하기로 했다. 하지만 송은 취약한 군사력으로 인해 금과의 맹약을 이행하지 못했고, 이로 인해 금이 요를 공격하여 연운 16주를 차지했다.
그러자 송은 금이 연운16주를 차지한데 분개하여 거란과 협력하여 금을 치고자 했으나, 요나라 황제 천조제가 사로잡힘으로써 송과 거란의 맹약이 드러났다. 이에 분개한 금은 송의 수도 개봉을 공격하였다. 황제였던 휘종은 금의 공세에 놀라 재빨리 아들에게 양위를 하였다. 이가 바로 흠종이다.
흠종은 수도를 포위한 금군과 협상을 벌여 영토의 할양과 배상금 지불 등을 논의하는 굴욕적인 내용의 강화를 맺게 된다. 그러나, 한세충을 비롯한 주전파는 그 강화에 반발하였고, 끝내 강화 맺은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것으로 인해 금나라는 다시 총공격이 시작된다. 40일간을 치열한 공방전 끝에 1126년 11월 수도 카이펑이 함락되고 만다. 그 해가 정강 원년이었다.
금나라는 황제였던 흠종과 그의 아비 휘종, 그리고 수많은 왕족과 관료 수천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 서진 황제 회제와 민제가 흉노족이 세운 한의 유총, 유요에 포로로 잡힌 이후 두 번째로 중국의 황제가 이민족에게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다. 금나라는 도교에 심취해 국정을 소홀히 했다며, 정신이 혼미하다는 의미로 흠종에게 혼덕공(昏德公), 휘종에게는 중혼후(重昏候)라는 모멸적인 칭호를 붙였다.
포로로 끌려간 송 휘종과 흠종, 그리고 휘종의 정 황후와 흠종의 주 황후 이 네 사람의 호송을 담당한 이는 금나라 장군 택리(澤利)였다. 신안현에 도착한 택리는 그곳의 현령과 함께 큰 연회를 열어 승리자의 모습으로 기뻐하며 많은 술과 음식을 먹었다. 술에 취한 그는 잔뜩 흥이 올라, 주 황후에게 술자리에 와서 노래를 부르고 흥을 돋우라 명령했다.
주 황후는 눈물을 머금고 야윈 몸을 이끌며 슬프게 노래를 불렀다.
幼富貴兮厭羅綺裳 어린 시절 부귀하여 비단 치마 싫증나네
長入宮兮奉尊觴 자라 입궁하여 귀한 술잔을 받았네
今委頓兮流落異鄕 이제 나이 들어 타향을 해매니
讚造物兮速死爲强 아! 조물주여 빨리 죽여 강하게 하소서
구슬프고 처절한 노래였다. 하지만 노랫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던 택리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그녀의 노래에 만족했다. 그는 술자리 흥을 돋우기 위해 주 황후에게 노래 한 곡조를 더 부르게 하고 현령에게 술을 따르라 했다.
昔居天上兮柱宮玉闕 과거 천상에서 보석으로 된 궁궐에 살았는데
今日草莽兮事何可說 이제는 풀숲에 있으니 이를 어찌 다 말로 할까
屈身辱志兮恨何可雪 몸을 굽혀 치욕을 당하니 이 한을 어찌 다 풀까
誓速貴泉下兮此愁可絶 어서 저 세상으로 가면 이 근심 끝낼 수 있을 텐데
두 황제와 두 황후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비통함을 금치 못했다.
이 때 술에 취한 택리는 주황후에게 손짓으로 자신의 곁에 앉혀 술시중을 들라했다. 주 황후가 미동하지 않자 택리는 비틀거리며 주황후 곁으로 가 억지로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녀는 술시중을 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이에 대노한 택리는 그녀가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질 때까지 닥치는 대로 때렸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흠종이 화가 나 호통 치며 그의 무례함을 꾸짖었다. 그러자 택리는 칼을 꺼내 흠종을 죽이려 했다. 신안현의 현령이 급히 말리며 "이들을 생포해 오라는 명령이셨습니다. 지금 그들을 죽인다면 아마 장군께 불리할 것입니다"
고 말하자, 그제서야 택리는 칼을 놓았다.
10여일 만에 일행은 잔뜩 먼지를 덮어쓴 채 금의 수도 연경에 도착했다. 두 황제와 두 황후는 민충사에 기거하다 며칠 후 서인의 신분으로 아골타의 동생이자 금 태종 오걸매(吳乞買)를 접견했다. 오걸매는 그들의 사형을 면해주고 영주로 보낸다고 말했다, 그 전에 네 사람은 흙으로 만든 작은 방에 갇혀 매일 썩은 고기 몇 점이 들어 있는 보리밥 두 그릇으로 생을 연명하며 지냈다.
주 황후는 상심한데다가 치욕까지 받으며, 추위와 배고픔에 고통 받다가 몸져누웠다. 흠종은 슬피 울며 의사의 진찰을 간청했지만, 문 밖의 병사는 큰 소리로 꾸짖을 뿐 가련한 흠종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로부터 3일 후 주 황후는 차디찬 흙방에서 고통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병사들은 그녀를 멍석으로 말아 대충 매장했다.
나머지 세 사람이 영주에 도착했다. 주령은 그들은 흙방에 가두고 번관(番官)과 정역(丁役)을 보내 그들을 감시하게 했다. 번관은 흉기를 검사한다는 구실로 정 황후의 몸을 뒤지면서 그녀에게 성적 수치심을 주었다. 정 황후는 휘종을 모셔야 했기에 울분을 참으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들은 영주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농사를 지은 탓에 피부가 까맣게 변하고 몰골이 초취했다. 만약 과거 신하들이 그들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들이 과거 황제, 황후였다는 것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일년 뒤 그들은 내주로 보내졌다. 하지만 남쪽에서 송군이 금군을 대패시켰다는 소식이 들리자 이들은 다시 오국성으로 옮겼다.
오국성에서 정 황후가 생을 마감했고, 3년 뒤 휘종은 실명하게 된다. 휘종은 더 이상 고국산천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울분을 토했다. 그는 낮에 가만히 앉아 있었고 밤에는 웅크리고 엎드려 마치 죽은 사람과 같았다. 이렇게 휘종은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이국 타향에서 54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휘종이 죽었지만, 흠종은 고국으로 돌아갈 희망을 안고 꿋꿋하게 살아갔다. 그는 21년 동안 힘들고 고통스러운 나날을 견뎠다. 남송 소흥 26년 금나라 황제 완안량(完顔亮)이 병사를 이끌고 송나라 정벌 준비에 나섰다. 병마를 검열하던 그는 흠종을 과녁 삼아 그를 향해 화살을 난사했다. 그리고 그의 시체를 진흙탕에 놓고 말들에게 짓밟게 했다. 흠종의 나이 56세였다.
한편 휘종의 아홉 번째 아들 조구가 극적으로 탈출하여 강남 임안에 남송(南宋)을 건국(1127년)하여 송은 명맥을 이어가게 된다.
그리고 남송에 대하여 이전의 송 나라는 북송(北宋 960~1126)이라 부르게 되었다.
_원문 출처 http://motion7.tistory.com/29 역사와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