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학 때 이미 생각해둔 캐릭터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지만, 정유정은 작업을 두 번이나 중단했다. 승민이 병원을 필사적으로 나가려는 이유는 시력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

정유정은 “내 시력이 독수리다. 밤눈은 어찌나 밝고, 동체시력까지 좋다. 안 보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승민의 심정과 상황을 이해 못 하겠더라. 그래서 그의 행동과 캐릭터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고 했다.
“저희 집 뒤에 삼봉산이 있어요. 봉우리가 세 개 있는, 250m짜리 낮은 산이죠. 거길 야간 산행을 해볼 생각이었어요. 남편이 따라가겠다는 걸 거부하고 플래시도 안 갖고 갔어요. 무서우면 그걸 켜게 될 게 뻔하니까요. 해가 질 무렵 올라갔더니 두 번째 봉우리에 오를 때쯤 비가 추적추적 내리면서 완전히 깜깜해졌어요. 날이 흐리니까 별빛, 달빛도 다 가려져서 제 손도 안 보였어요. 그래도 몇 년 동안 다닌 산이라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는데, 산을 울리는 산짐승 소리에 놀라서 구르고 엎어지면서 뛰어내려왔어요. 알고 보니 산 밑의 놀이동산에 있는 호랑이가 우는 소리였죠. 그날 밤 새벽 네 시에 깨서 승민이 즐겨 듣는 트위스트 음악을 틀어놓고 몸을 들썩이며 글을 썼어요.”
소설은 ‘엉덩이 힘’으로 쓰는 것
![]() |
| 정유정 작가의 작업실. |
“몇 년간 영화나 드라마 등 영상매체를 거의 접하지 않았어요. 최근 몇 년간 본 작품이 손에 꼽아요. 《28》을 쓸 때 개썰매가 나오는 영화 한 편, 장준환 감독님과의 대담 때문에 〈화이〉란 영화 한 편, 그리고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의무적으로 봐야 했던 영화 몇 편 정도예요. 영상을 보면 그 프레임에 딱 갇혀버려요. 문을 열고 나가야 하는 장면을 묘사하는데 상당히 인상적인 방법으로 문을 연 장면이 영화에 나오면 소설을 쓸 때도 거기에 갇히거든요. 인물의 감정도 마찬가지예요. 정유정이 《내 심장을 쏴라》를 쓰면서 상상에만 의존했던 것이 바로 승민이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 가는 장면이다. 당시에는 사진만 보고 ‘안나푸르나는 이럴 것이다’라고 묘사했다.
그는 “안나푸르나에 가긴 갔다. 2013년에”라고 했다. 2013년이면 그가 《28》을 끝냈을 무렵이다.
“《28》을 마치고 나서 고갈된 느낌이었어요. (그는 컵을 손으로 막으면서) 슬럼프는 뜨거운 게 갇혀 있는 거라서 (손을 떼면서) 그걸 이렇게 풀어주면 되는데, 그땐 갇혀 있을 것도 없이 제 안이 텅 비어버렸죠. 예전의 작업노트를 보는데 수명이 어떤 기분으로 세상에 나갔는지 묘사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그 부분을 찢어서 유리병에 담아서 안나푸르나로 갔어요. 17박18일 동안 산을 종주하면서 고산병으로 죽을 뻔했는데 승민이 봤다고 묘사한 ‘별들의 바다’를 계속 못 봤어요. 그러다가 18일째 되는 날,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높다는 봉우리 아래서 잠을 자는데, 빛 때문에 깼어요. 빙벽이 별빛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었죠. 신발을 찾을 겨를도 없이 맨발로 나가서 유성우를 봤어요. 그 별들이 다 넘어가고 동이 틀 때까지 서 있었어요. 소름이 끼쳤죠.”
![]() |
| 정유정 작가의 작업 노트. |
“성격적으로 운동을 좋아하고, 지구력이 강한 편이라 달리기와 복싱을 주로 했어요. 그거 하고 나면 고갈된 에너지가 차오르는 느낌이 들거든요. 승민이 병원에서 샌드백을 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그건 제가 샌드백을 오랫동안 때려왔기 때문이에요. 무명 때부터 복싱을 했던 이유가 있어요. 등단하기 전, 2001년에 책이 나왔는데 전혀 팔리지 않는 거예요. 게다가 공모전에는 계속 떨어져서 패배주의와 분노에 가득 차 있었고요. 공모전에 10번째 떨어졌을 때 절망하다 못해 분노가 폭발해서 베란다에 남편이 달아준 샌드백을 치기 시작했어요. 해가 진 줄도 모르고 밥도 안 해놓고 ‘여긴 어디? 나는 누구?’란 심정으로 계속 쳤죠. 집에 들어온 남편이 불을 켜면서 ‘자네 뭐해?’라고 물을 때 정신이 들고 보니 손이 다 까져서 팔까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어요. 저녁을 먹는데 남편이 묻더군요. ‘그렇게까지 글이 쓰고 싶어?’ 눈물이 왈칵 쏟아졌죠.”
복싱과 안나푸르나처럼 작가에게 힘을 줬던 것은 모두 승민이 좋아하는 것이다. 승민은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안나푸르나에 가겠다고 우긴다. 그것은 자살에 가까운 행위다. ‘자살’이란 해석에 정유정 작가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승민에게 있어 삶이란 ‘나로서 내 인생을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죽으러 가는 게 아니라 인생을 살러 가는 것”이라고 했다.
“승민을 통해 저는 제 인생을 상대해볼 힘을 얻었어요. 엄마가 아프고 동생들을 돌보느라 제 인생을 살 수 없었던 그 시기에 제 어깨를 두들겨준 무언가였어요. 어깨에 있는 짐을 덜어주진 않아도 계속 나가라고 등을 두들겨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제가 그랬던 것처럼 버티는 삶을 사는 청춘이 많이 있을 거란 말이에요. 《내 심장을 쏴라》가 어깨를 두들겨주고 ‘힘내’ 라고 말해주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라요. 어느 세대에서나 청춘은 불안하고 힘들어요. 그것을 버텨야지만, 살아내야지만 합니다.”
정유정 | 1966년 전남 함평 출생. 기독간호대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로 일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심사직으로 근무했다. 2007년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로 5천만원 고료 제1회 세계청소년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했고 2009년《내 심장을 쏴라》로 1억원 고료 제5회 세계문학상을 받았다. 그 후 2011년 《7년의 밤》을 발표했고, 장편소설 《28》은 주요 언론과 서점에서 2013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어 큰 화제를 모았으며, 지금도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_ 톱클래스 2015년 04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