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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도 시 제 10 호 나비 해석 - 김유섭

작성자김유섭|작성시간19.09.08|조회수1,926 목록 댓글 0

오감도 시 제 10 호 나비 해석 - 김유섭


찢어진壁紙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 그것은幽界에絡繹되는秘密한通話口다. 어느날거울가운데의鬚髥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 날개축처어진나비는입김에어리는가난한이슬을먹는다. 通話口를손바닥으로꼭막으면서내가죽으면안젓다일어서듯키나비도날러가리라. 이런말이決코밧그로새여나가지는안케한다.

-오감도 시 제 10 호, 전문-

 

 오감도 시 제 10 호는 앞서 8호, 9호와 마찬가지로 소제목이 붙어있다. 그런데 소제목 “나비”는 한글이다. 이것은 이상이 의도하고 상징하는 것이 한글에 있다는 이야기다. 앞서 8호, 9호에 붙였던 한자 소제목 역시 이상이 의도한 의미와 상징이 있었듯이 오감도 시 제 10 호 한글 소제목 “나비” 역시 한글을 의도적으로 상징화 시킨 것이다.

우선 소제목 “나비”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석해보자. “나비”는 한글이다. 발표된 연작시 오감도 15편중에 소제목이 붙은 시가 3편인데 그 중에 한글 소제목은 “나비”하나다. 따라서 “나비”는 조선 민족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나비는 통상적으로 꽃과 함께 시에 등장할 경우 남성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오감도 시 제 9 호에 꽃은 나오지 않는다. 이런 경우에 나비는 여성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나비 단독으로만 작품에 등장했을 때 여성이 아닌 경우는 아기나 어린아이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아기나 어린아이를 암시하거나 상징하는 어떤 단어나 정황 역시 오감도 시 제 9 호에 나오지 않는다. 때문에 “나비”는 조선 민족 중 ‘여자’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나비”가 상징하는 것이 왜 사람인가?

나비가 찢어진 벽지에 죽어간다는 것은 그 장소가 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울 가운데의 수염에 죽어가는 것 역시 그 장소가 실내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안젓다일어서듯키”다. “안젓다일어서듯키”는 ‘별일 아닌 듯이’ 라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이상이 “나비”가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방안과 실내에서 죽어가던 나비가 “안젓다일엇듯키” 날러간다는 것이 사람을 상징하고 은유하는 것임을 수긍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두 가지 추론을 합하면 소제목 “나비”는 조선 민족 여성으로 해석해도 크게 어긋난 것이 아닐 것이다.

 

 시로 들어가자.

 “찢어진壁紙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

 찢어진 벽지(壁紙)에 죽어가는 나비를 본다.

벽지(壁紙)를 한자사전의 의미를 따라가지 않고 이상의 오감도식 한자로 풀면

壁: 군루(軍)라는 의미가 있다. 군루(軍壘)는 한자사전에는 없는 단어이고 다만 일본어 사전에 군루(軍壘)는 없지만 유사한 단어로 군령(軍令)이 나온다. 따라서 그대로 풀면 군령(軍令)지(紙)가 된다.

때문에 한자 의미를 일본어 유사단어까지 확대하면 벽지(壁紙)를 군령지(軍令紙)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상은 일본어로 시를 발표할 정도로 일본어에 능통했고 한자를 글자보다도 그 의미의 상징으로 보고 새로운 상징 조합으로 단어를 만들고 또 기존의 단어의 의미를 무시하고 자신이 의도하는 상징으로 의미를 읽어 해석하게 만드는 등의 시창작법을 앞서 수없이 확인했기에 이상이 벽지(壁紙)를 군령지(軍令紙)로 해석할 수 있게 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군령지(軍令紙)를 벽지(壁紙)로 위장시켰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더구나 이상이 오감도 연작시를 발표한 지 90년이 가까워오는 현시점에서 해석의 어려움은 벽지(壁紙)의 벽(壁)의 의미 중에 하나인 군루(軍)가 당시 사람들이라면 일본어로 군령(軍令)임을 바로 알 수 있었을지 아닐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벽지(壁紙)의 해석을 유사단어까지 확대했을 때 군령지(軍令紙)임을 밝히는 정도에서 멈추고 이상이 마련해놓은 차선의 해석으로 가려고 한다. 즉 벽지(壁紙)를 벽지(壁紙)로 읽어 해석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차후에 좀더 구체적인 자료가 나오면 수정을 하더라고 유사단어까지 확대하면서 해석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벽지(壁紙)를 군령지(軍令紙)로 해석했을 때 더욱 명확한 시 해설이 가능하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린다.

 

 “찢어진 벽지(壁紙)에 죽어가는 나비를 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일상생활에서 벽지가 찢어지는 경우가 몇 가지나 될까? 벽지를 다시 바르기 위해 뜯어내거나....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일상적인 생활에서 벽지가 찢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찢는 경우를 제외하고 말이다. 그렇다. “찢어진 벽지(壁紙)”는 일상적이지 않는 상황이나 사건에 의해서 벽지가 찢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비가 죽어가기 때문이다. 나비가 죽어간다는 것은 결코 평화롭거나 일상적인 상황에서 벽지가 찢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거부하지 못하거나 막아내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그 상황의 결과로 벽지가 찢어진 것이다. 그리고 나비가 죽어간다고 읽힌다. 앞서 “나비”는 조선 민족의 여성을 상징한다고 추정해 해석 했다.

즉 ‘어떤 폭력적인 상황으로 가정이 찢어져 죽어가는 조선 여성’을 은유하는 것으로 읽힌다.

덧붙여 살피면 벽지는 방안을 의미하고 방안은 가정의 내밀한 곳이다. 그런데 내밀한 방안의 벽지가 찢어지는 것은 가정의 울타리로 지켜낼 수 없는 것이 닥쳐와서 벽지를 찢었다는 이야기다. 때문에 나비가 죽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제시된 시의 내용만으로는 무엇이 닥쳐와 벽지를 찢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앞서의 유사단어까지 해석의 폭을 넓히면 그것이 군령지(軍令紙)임을 알 수 있고 의미는 명백해진다. 그러나 기억만 해두자.


 “그것은幽界에絡繹되는秘密한通話口다.”

 그것은 유계(幽界)에 낙역(絡繹)되는 비밀(秘密)한 통화구(通話口)다.

  여기서 “그것은”의 의미는 참으로 중요하다. 지금의 해석으로 “그것”이 지목하는 것은 “벽지(壁紙)”라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이렇게 읽었을 때 의미가 불명확해지고 살펴 읽을수록 “그것”이 가리키는 것이 “벽지(壁紙)”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해진다. 이것을 이상이 만든 오독을 막기 위한 장치로 생각되지만 군령지(軍令紙)로 해석해서 의미가 명확해지는 것을 선택하지 말고 “벽지(壁紙)”로 계속 가자.

그래서 “벽지(壁紙)”가 찢어진 원인을 추정할 수밖에 없고 그 추정에 따라 “그것은”이 지목하는 것이 벽지가 찢어진 원인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때문에 벽지를 찢어 조선 여성을 죽어가게 한 것이 무엇일까?

일단 의문 하나를 두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자.

“유계(幽界)에 낙역(絡繹)되는 비밀(秘密)한 통화구(通話口)다.”

“유계(幽界)”는 저승이고 “낙역(絡繹)”은 사전적 의미가 사람이나 수레의 왕래가 끊이지 않음이다. 따라서 “유계(幽界)에 낙역(絡繹)되는”을 그대로 해석하면 ‘저승(幽界)에 사람이나 수레의 왕래가 끊이지 않음(絡繹)되는’이다. 여기서 유계(幽界) 즉 저승은 한자단어 뜻 그대로 해석하고 낙역(絡繹)의 의미 역시 한자사전의 의미대로 해석해서 문맥에 맞추면

“저승에 끊이지 않고 사람이나 수레가 왕래(絡繹)되는”이 된다. 이 문장의 의미는 ‘제승에 끊이지 않고 사람이나 수레가 왕래되는 삶’과 ‘저승에 사람을 끊이지 않고 수레로 실어 나르는’의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오감도 시 제 10 호에서 두 가지 해석을 상황에 따라 그대로 적용해도 큰 무리는 없다. 그리고 비밀(秘密)은 문맥에 따라 ‘숨겨 은밀한’으로 바꾼다.

이어진 “통화구(通話口)”는 한자사전에 없는 이상이 만든 단어다. 그래서 통화구(通話口)에 주목해야 한다. 오감도식 순서대로 읽어 풀면

‘通: 한자사전 뜻 중에 알리다, 話: 한자사전 뜻 중에 말하다, 口: 한자사전 뜻 중에 주둥이’ 문장으로 풀면 ‘알려 말하는 주둥이’다.

“저승(幽界)에 끊이지 않고 사람이나 수레가 왕래(絡繹) 되는 숨겨 은밀(秘密)한 알려 말하는 주둥이(通話口)다.”

저승에 끊이지 않고 사람이나 수레가 왕래되게 하는 숨겨 은밀한 일을 알려 말하는 주둥이라는 것이다. ‘알려 말하는 주둥이’는 명령하거나 통보하는 주둥이를 의미한다. 즉 죽음을 명령하고 통보하는 주둥이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사실은 저승으로 끌고 가는 것과 다름없는 어떤 일을 명령하고 통보하는 주둥이를 이상은 통화구(通話口)라는 단어를 만들어 상징하고 있다.

 

 통화구(通話口)는 오감도 시 제 10 호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상징이면서 해석의 단서가 된다.

첫 문장으로 돌아가서, 앞서 의문으로 남겨 두었던 벽지가 찢어진 이유가 통화구(通話口) 즉 ‘알려 말하는 주둥이’ 때문임을 수긍할 것이다. 즉 벽지가 찢어지고 나비가 죽어가게 된 원인이 바로 죽음과 다름없는 일을 명령하고 통보하는 ‘알려 말하는 주둥이’에서 촉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시 살피면, ‘알려 말하는 주둥이’이가 명령하고 통보한 죽음과 다름없는 일 즉 명령의 내용 때문에 벽지가 찢어지고 나비가 죽어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첫 번째 문장과 두 번째 문장은 하나로 이어지면서 서로 보완하고 있다. 그런데 이어서 다시 나비가 등장한다.


 “어느날거울가운데의鬚髥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

  마치 영화의 장면이 바뀌듯 앞의 문장에 이어지지 않고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된다. 흔히 이런 장면을 영화로 생각한다면 세월이 흘렀거나, 아니면 다른 이야기로 옮겨가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앞서의 나비라면 아마도 약간의 세월이 흐른 뒤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으로 연속성을 가지면서 같은 나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서의 나비와는 관련이 없는 또 다른 나비라면 두 개의 나비 이야기를 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두 개의 나비 이야기라고 하더라도 앞서의 상황 이후에 일어났거나 일어날 상황을 보려주려는 의도로 보인다. 때문에 앞의 나비와 뒤에 등장하는 나비가 같은 나비인지 아닌지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살펴보면 앞서 나비의 상황에서 세월이 흐른 뒤의 나비의 상황, 즉 통화구(通話口), 알려 말하는 주둥이를 통해 무엇인가를 명령받고 통보 받아 찢긴 벽지에 죽어가던 나비가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통화구(通話口)가 명령하고 통보한 내용이 무엇인지 그것이 왜 저승으로 끌고 가는 것이고 찢어진 벽지에 나비가 죽어가게 되는 것인지를 역으로 설명해주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돌아가서

 

 “어느 날 거울 가운데의 수염(鬚髥)에 죽어가는 나비를 본다.”

  이 문장에는 세 개의 상징이 등장한다. “거울” ,“鬚髥”, “나비”, 세 개다. 이미 나비는 조선 민족 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추정하고 해석을 진행해 왔다. 따라서 나머지 두 개의 상징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를 풀면 이 문장이 의미하는 것이 드러날 것이다.

하나, “거울”은 이상의 시, 여러 작품에 등장한다. 심지어 “거울”이라는 독립된 작품도 있다. 그러나 살펴야 할 것은 다른 작품들과 달리 거울의 안과 밖이라는 상황이 설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거울 가운데의”라고 진술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이 문장 속에 “거울”은 상징하거나 은유하는 것이 없는 그냥 얼굴을 비춰보는 일반적인 거울로 한정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거울”과 관련된 다른 진술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어져 붙어있는 “가운데의”라는 명사에 더욱 주목해야 한다.

이 문장에서 거울은 나비의 소유물이 분명하다. 소유물이 아니라도 얼굴을 비춰보는 용도로 쓰는 거울 사용자라고 해야 할까? 더구나 “나비”가 조선 민족 ‘여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때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거울 가운데의 수염(鬚髥)”이다. “수염(鬚髥)”이 상징하는 것은 뒤에 살피기로 하고 “거울 가운데의”가 의미하는 것은 거울을 사용하는 권리가 수염에게 있다는 말이 된다.

즉 “거울”의 사용자는 나비가 분명하지만 거울을 장악하고 지배하는 것은 나비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거울 가운데”라고 명시한 것이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거울이 얼굴을 비춰보는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면 거울 가운데는 당연히 나비나, 나비의 얼굴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거울 가운데는 수염이 있다.

더구나 그 “수염(鬚髥)”에 나비가 죽어간다는 것은 수염이 거울뿐만 아니라 나비마저도 장악하고 폭력적으로 지배한다는 의미가 된다. 때문에 “거울“거울 가운데의”가 상징하는 것은 “나비”가 없는 “나비”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비”의 삶은 “수염(鬚髥)”에게 폭력적으로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 “수염(鬚髥)”이 무엇을 상징하는가?

  뒤따르는 문장 “나비가 죽어가는”이라는 진술 때문에 “수염(鬚髥)”이 나비를 죽어가게 하는 존재라는 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앞서 나비를 죽어가게 했던 찢어진 벽지와 지금 나비를 죽어가게 하는 “수염(鬚髥)”은 나비의 입장에서 봤을 때 죽어가게 하는 요인이라는 면에서 동일한 것이다. 그리고 시의 흐름을 따라 읽으면 “찢어진 벽지”와 “수염(鬚髥)”은 시작과 결과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즉 찢어진 벽지에 죽어가던 나비가 시작이었고 거울 가운데의 수염에 죽어가는 나비가 그 결과로 죽음이 더 가까워진 상황에 놓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나비가 죽어가는 이유가 찢어진 벽지에서 거울 가운데의 “수염(鬚髥)”으로 바뀌었지만 나비는 더욱 처첨하게 죽어가고 있고 저승을 왕래하는 죽음에 직면해 있는 상황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날개축처어진나비는입김에어리는가난한이슬을먹는다.”

  “거울 가운데의 수염(鬚髥)”에 죽어가는 나비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시적 화자인 “아해” 조선 민족이 “나비”의 처참한 처지와 삶을 목격하고 진술하는 것이다. 앞서 두 번! 나비의 상황을 진술하면서 마지막을 “본다”로 마무리했던 까닭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시적 화자 즉 “아해”가 나비의 비극적인 상황을 목격하고 진술하는 것을 너머 외치고 증언하는 것이다.

여기서 “나비”는 조선 여성 전체가 아니라 찢어진 벽지와 수염에 죽어가는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조선 여성의 삶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읽힌다.

“날개 축 처어진 나비는” 날개가 축 쳐졌다는 말은 일상적인 삶을 이어가지 못할 정도로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고 “입김에 어리는 가난한 이슬을 먹는다.”

이 부분이 오감도 시 제 10 호 나비를 해석하는 방향을 살펴 확인하는 단서를 준다. 입김에 어리는 가난한 이슬을 먹는다는 것은 무엇을 은유하는가? 자신의 입에서 나온 입김 중에 너무나 조금이 고여서 이슬이 되는데 그것도 가난한 이슬이다. 그것으로 삶을 이어간다는 것이다.

이슬이 상징하는 것은 더렵혀지지 않은 순수함일 것이다 즉 가난한 이슬은 “수염(鬚髥)”의 폭력적 지배에 짓밟혀 갈수록 더렵혀져 없어져 가는 깨끗한 순수함이다. 그 가난한 몇 방울의 순수함을 먹고 끊어질 듯 죽어가는 삶이 이어지고 있는 비극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조선 여성의 이런 비극적인 상황이 어떤 역사적 사건을 은유하는지 독자에게 묻고 싶다.

 

 이제 “수염(鬚髥)”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오감도 시 제 15호에 등장하는 의족, 군용장화와 함께 “수염(鬚髥)”은 폭압적인 식민지지배 일본 헌병이나, 일본군을 상징하는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왜 그런가? 이상은 시인이면서 화가이기도 했다. 놀라운 것은 이상의 오감도를 읽으면서 발견하는 무수한 시작법 가운데 또 하나는 이상이 일본 헌병이나, 일본군을 캐릭터 그림으로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는 확신이 든다. 오감도가 중단되지 않고 30편까지 발표되었더라면 이상이 추악한 제국주의 일본 헌병이나, 일본군을 캐릭터로 그린 그림의 완성된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덧붙여 “나비”를 죽어가게 하는 것이 “거울 가운데의 수염(鬚髥)”이다. 나비가 조선 민족 여성이라면 조선 민족 여성을 죽어가게 하는 것은 제국주의 일본임이 분명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거울 가운데의 수염(鬚髥)”으로 표현한 것은 제국주의 일본의 남자로 읽힌다. 그것은 결국 “거울 가운데의 수염(鬚髥)”을 추악한 일본 헌병이나 일본군으로 해석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라는 단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처참한 나비의 삶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 모든 것의 근원은 알려 말하는 주둥이(通話口)다. 알려 말하는 주둥이(通話口) 때문에 찢어진 벽지에 나비가 죽어가기 시작했고 어느 날 거울 한가운데 수염에 죽어가는 나비로 이어진 것이다. 이러한 나비의 삶은 저승을 들락거리는 것과 다름없는 처참한 것이다. 그나마 자신의 입김에 어리는 가난한 이슬을 먹고, 즉 더렵혀지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 끊어질 듯 죽어가는 삶을 이어가는 비극의 상황으로 내몰린 것이다. 명백하게 알려 말하는 주둥이(通話口) 때문이다.

여기서 오감도 시 제 10 호 첫머리로 되돌아가서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찢어진壁紙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에서 시적 화자인 “아해”가 첫 번째 목격한 상황을 외치면서 증언하고 있다. 이 문장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찢어진 벽지 때문에 나비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러한 비극적인 상황을 시적 화자가 “본다.”, 보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 비극적인 상황의 원인과 결과를 시적 화자는 알고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그것은幽界에絡繹되는秘密한通話口다.” 앞서의 해석에서는 “그것은”이 가리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시를 중반부까지 읽고 난 지금은 “그것은”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찢어진 벽지에 나비가 죽어가게 하는 것은 막아내거나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폭력이다. 거대한 폭력이 벽지를 찢어지게 하고 나비를 죽어가게 한 것이다.

때문에 “그것은”이 가리키는 것이 바로 ‘거대한 폭력’임을 알 수 있다. ‘거대한 폭력’은 저승을 왕래하게 되는 숨겨 은밀한 알려 말하는 주둥이(通話口)의 명령과 통보이기도 하다. 살펴보면 ‘알려 말하는 주둥이’가 ‘거대한 폭력’을 명령하고 통보해서 벽지를 찢어지게 한 것으로 읽힌다. 때문에 둘은 한 몸이다. 그리고 다음 문장에서 그 이후에 죽어가는 나비가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어느날거울가운데의鬚髥에죽어가는나비를본다.” 벽지를 찢어지게 했던 거대한 폭력은 이어서 거울 가운데의 수염으로 나타난다. 수염은 찢어진 벽지와 마찬가지로 나비를 죽어가게 한다. 그러나 찢어진 벽지에 죽어가던 나비가 한층 더 처참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즉 찢어진 벽지에 죽어가던 나비가 어느 날 거울 가운데의 수염에 죽어 가는데 죽어가는 것이 저승을 왕래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 비극적인 상황이고 한 줄기 더렵혀지지 않는 순수함으로 견디는 삶을 이어가는 것으로 읽히는 까닭이 무엇일까? 다시 시 중반부로 돌아가자.


 “通話口를손바닥으로꼭막으면서내가죽으면안젓다일어서듯키나비도날러가리라.”

  지금까지 목격과 증언으로 이어져 오던 시의 흐름이 바뀐다. 시적 화자가 어떤 행동을 예고한다. 여기서 예고한다고 읽는 것은 꿈꾼다거나 상상한다고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비장하고 결의에 차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서의 목격과 외침과 증언에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나아가겠다는 것이다. 더는 보고 있을 수 없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때문에 멀지 않은 미래에 벌어질 행동을 예고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 그것을 뒤에 나오는 마지막 문장이 확인시켜주고 있기도 하다.

이 모든 비극을 가져오는 “알려 말하는 주둥이(通話口)를 손바닥으로 꼭 막으면서 내가 죽”겠다는 것이다. 왜? “안젓다일어서듯키 나비도 날러”갈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나비에 붙어있는 조사 ‘도’다. “나비” 뒤에, 는, 가, 등의 조사가 아니라 “도”를 붙인 이유가 있다. 이상의 놀라운 시작법이다. 마치 시의 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사 ‘도’는 둘 이상의 대상이나 사태를 똑같이 아우름을 나타내는 보조사다.

살펴보면 ‘나비’ 뒤에 보조사 ‘도’가 붙으면 얼핏 의미가 모호해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죽고 나비는 날러가는 것은 죽음과 삶으로 갈라지는 것이고 그것은 앞서 보조사 ‘도’의 의미로 읽었을 때 혼란을 준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상이 그렇게 읽으면 ‘오독입니다.’ 라고 가르쳐 주는 장치다. 그리고 이렇게 읽어야 시의 의미가 명확해지는 것입니다. 친절을 베푸는 것이기도 하다. 즉 여기서 보조사 ‘도’를 쓴 이유는 나의 죽음으로 인해 나비가 삶으로 날러가는 것이 삶과 죽음 두 길로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런가? 나의 죽음과 나비의 삶, 그 너머에 나와 나비가 함께 염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 염원은 삶과 죽음으로 갈라지는 것이 아닌 절대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나의 죽음으로 “나”와 “나비”의 염원이 이루어지고 그래서 나비가 별 일 아니었다는 듯 “안젓다일어서듯키” 날러가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보조사 ‘도’를 붙인 것이다. 이런 이상의 의도를 읽어냄과 동시에 내가 죽어서라도 이루어야 하는 것, 나와 나비가 함께 염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한다. 그것은 제국주의 일본으로부터 조선 민족의 해방이라는 것을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다시 풀면

  “알려 말하는 주둥이(通話口)를 손바닥으로 꼭 막으면서 내가 죽으면”은 모든 비극의 원인인 알려 말하는 주둥이를 손바닥으로 꼭 막아버리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또 한 번 이상의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조롱이 나온다. “알려 말하는 주둥이(通話口)”는 조선을 침략하고 강점한 제국주의 일본 왕으로 읽힌다. 조선을 강점하고 만주를 침략해서 괴뢰국을 세운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지배는 일본 왕의 입에서 나온 명령에 의해서다. 그로인해서 나비가 죽어가는 비극이 생겨난 것이다. 때문에 조선 민족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 왕은 비극을 알려 말하는 주둥이일 뿐이다. 이것 역시 이상의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혐오와 조롱이다. 뿐만 아니라 내 손바닥으로 꼭 막겠다는 것은 일본 왕 따위는 내 손바닥으로 주둥이를 꼭 막으면 사라져버릴 하찮은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물론 내가 죽기는 하겠지만 “안젓다일어서듯키나비도날러가리라.”

별일 아니라는 듯 나비가 삶을 되찾아 자유로이 날러가고 나의 염원이고 나비의 염원이자 조선 민족의 염원인 해방이 올 것이라는 말이다. 때문에 나비에 보조사 ‘도’를 붙인 까닭을 명확하게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덧붙이면 내가 죽으면서 손바닥으로 주둥이를 막아 버리면 나비가 “안젓다일어서듯키” 날아가는, 즉 조선 민족의 염원인 해방이 올 것이라는 은유가 “알려 말하는 주둥이(通話口)”가 제국주의 일본 왕임을 뒷받침하고 있다.

 

 동시에 시적 화자인 “내”가 가까운 미래에 제국주의 일본의 만행을 죽음으로 응징하는 행동을 실행하겠다는 결심을 밝히고 있다. 그래서 다음 문장이

“이런말이決코밧그로새여나가지는안케한다.”

더 설명이 필요 없는 결말이다.

이제 이상이 오감도 시 제 10 호에 소제목 “나비”를 붙인 까닭을 알 수 있다. “~ 무섭다고 그리오”의 또 한명 “아해”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놀랍게도 1930년도 초반 제국주의 일본의 감당할 수 없는 식민지지배 폭압정책으로 죽어가는 조선 민족 여성이다. 당시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지배 폭압 정책으로 죽어가지 않았던 조선 민족 여성이 얼마나 되었는지 모르지만 ‘1932년 <일본군 위안소> 설치, 조선 여성들의 노동력 착취를 위해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여자 근로 정신대>’-『두산백과』, 등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지지배 폭정에 조선 민족은 남자뿐만 아니라 어린 소녀부터 여성들까지 수없이 많은 희생과 죽어가는 삶을 살고 있음을 이상은 오감도 시 제 10 호에서 목격을 증언하고 외치고 있다.

그러나 이상은 목격을 증언하고 외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일본에 대해 응징하는 결사의 행동을 예고하고 있다. 더는 제국주의 일본의 만행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 “아해” 조선 민족 모두의 마음속에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던 분노와 증오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1936년 이상이 동경으로 건너가서 1937년 불량선인으로 체포되어 불꽃으로 타오르던 생을 마감한 사실이 예사롭지 않게 생각된다. 혹시라도 이상이 이 모든 비극의 근원인 일본 왕의 주둥이를 막아버리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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