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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상반기 〈시와반시〉 신인상 당선작_김미라, 박지현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24.03.19|조회수1,022 목록 댓글 0

2024년 상반기 시와반시신인상 당선작_김미라, 박지현

 

                                              심시위원: 강현국, 조말선

 

 

가정이라는 평화 (외 4편)

 

   김미라

 

 

뼈 있는 말씀이 왔다

 

당신은 사소한 것은 사소해도 된다고 했다

나는 사소한 것은 결코 사소할 수 없다고 했다

뼈 있는 것과 뼈 없는 것은

넘어서기 힘든 극명한 간극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서둘러 치킨을 먹었다

먹고 남은 뼈가 이해의 테두리를 벗어나

다른 해석으로 쌓였다

 

어디까지가 사소한 것인지

닭에게 물어볼 생각 따윈 애초부터 없었다

이해로 가는 길만큼

배달의 경로는 자세히 적혀 있지 않았다

 

우리는 자꾸 접촉 사고가 났다

 

각자의 방식으로 치킨을 납득하는 동안

오해는 한층 조밀해졌고

이해로 가는 경로는 흐려졌다

 

닭 한 마리가 과거에서 현재로 소환되는 동안

여전히 사소한 것은 사소할 뿐이고

우리는 각자 배달의 지도 위에서 최선을 다했다

 

치킨은 뜨거울 때 먹어야 맛있다

사랑도 그렇다

 

 

 

어제

 

 

   무화과를 반으로 갈라 속을 파먹었다. 씨앗이 멋대로 접시 위로 떨어지더니 나무로 자랐다. 원목 탁자가 나무를 이기지 못하고 다리가 부러졌다. 먹다 남은 마가린을 꺼내 부러진 다리에 발랐다. 식물성은 식물성끼리 어울리니까 버터는 사용하지 않았다. 노란 마가린을 바른 자리에 무화과가 피었다. 꽃인지 열매인지 모르는 과일을, 탄생이 시작인지 죽음이 시작인지 모르는 내가 먹으니 정말 어울렸다. 무화과가 익는 동안 놀이터의 아이들이 자랐다. 아이들은 동물성이니까 버터가 더 어울렸다. 505호 옆집은 버터를 이용해 아이를 기르고 남은 버터를 테이블 다리에 발랐다. 저녁이면 가끔 청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렸다. 어둠이 저마다의 본명을 요구할 때 다리를 접고 베란다를 넘어 옆집으로 가는 무화과를 보았다. 그곳에서 무화과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나도 나의 본명을 잘 몰랐으니까. 다만 알 수 있는 것은 여백이 길면 무섭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무화과가 우리 집에서 긴 여백을 보았는지도 모르겠다. 집안에는 아직 먹지 않은 무화과가 남아 있고 어제는 조금밖에 죽지 못했다.

 

 

 

만두는 비밀을 알고 있다

 

 

만두소를 준비하는데 야맹증이 왔다

침침한 눈으로 고기를 손질하다 손톱이 썰렸는데

어디로 튀었는지 찾지 못했다

혹시라도 이물질을 들킬까

만두의 주둥이를 단단하게 봉했다

 

꽁꽁 얼어 입도 뻥끗 못하도록

냉동실에 넣었다

식구들에게 만두를 내주기 전까지

냉장고는 훌륭한 조력자였다

 

냉동실이 각종 비밀로 가득 차던 날

만두를 꺼내 도가니에 넣고 끓였다

나는 그것이 끝까지 입을 열지 않기를 바랐다

식구들은 맛있게 만두를 먹었다

나는 만두를 먹지 않았다

 

비밀은 모르고 지나갈 때 더 튼실해지는 법

사람들은 만두소와 비밀을 함께 버무린다

그리고 입구를 굳게 닫아버린다

 

만두는 그 모든 비밀을 알고 있다

 

 

김미라 / 숙명여대 대학원 사회복지학과 졸업. 충주가족센터 한국어 교원. 2024년 상반기 시와반시신인상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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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락서점1 (외 4편)

 

     박지현

 

 

   세 번을 보았으나 얼굴을 떠올릴 수 없다 말이 오가는 중에도 내가 한 말만 떠다닐 뿐 그이가 한 말은 없다 우는 표정을 짓는가 싶으면 금방 입꼬리가 올라갔는데 여전히 눈만은 어딜 보는지 몰랐다 말 대신 손짓이 쉬워 보였다 가리키는 손끝을 따라가면 두텁고 둥근 곳에 이르렀다 초점이 두세 군데로 나뉘어 몰렸기 때문에 고개를 돌려가며 보는 곳을 찾았다

 

   발이 필요 없다는 듯 당기는 대로 움직였다 없어도 있는 듯했고 있어도 밀려갔다 서점으로 찾아가지 않아도 있다고 하면 있을 사람이었다 당기는 것은 도처에 있었다 한번은 남자의 얼굴로 말을 했는데 확인하려 대답을 조르니 죽은 지 이십 년도 지난 K의 찡그림을 보여 주었다 눈물이 나지 않는 만남이었고 선물은 아니었다

 

   그이가 책장을 서성이는 걸 본 적이 있다 팔을 폈다 접을 때마다 공기가 모였다 모인 공기가 진회색 벽으로 걸어 들어갔고 뒤를 이어 웅얼대던 소리도 따라나섰다 손에 든 책을 모두 꽂은 후에도 팔을 휘적거렸다 숨이 모자랐고 참을 수 없는 하품이 났다

 

   언제 집으로 가시냐고 물으니 있고 싶은 만큼 있다고 했다 잊고 싶은 만큼 잊는다는 소린 줄 알고 매우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악수를 청하니 읽고 있던 책의 얼굴을 보여 주었다

 

   문장이 스며든 얼굴이었다

 

 

 

영락서점2

 

 

   파티를 모르는 사람들은 초대를 몰랐다 영락서점의 새해파티 모르는 사람들은 북적이는 모임을 떠올리고 미련도 없어라 서로 말을 하지도 눈을 마주치지도 말아야 하는 파티 안심할 만하지

 

   먹을 것도 음악도 없는 파티가 시작도 없이 간다 서점주인은 영락으로 들어서는 사람을 소리 내어 세었다 하나 둘 셋책을 뒤적이는 소리는 몸이 받아낼 수 있는 소리 숫자가 이어지는 소리 외엔 소리는 없다 그마저 구에서 멈추고 완벽한 무음의 세계를 가진다 파티의 클라이맥스

 

   머문 적이 없는 것처럼 서점을 걸었다 외투를 벗는 사람이 없었다 모자를 손에 든 사람과 장갑을 낀 사람은 화초를 더듬었고 울상을 짓던 사람이 신발을 찾아다녔다 춤을 추기 시작한 사람은 김아무개였다 느적느적 움직임이 있었다 눈과 입은 열어둔 채 눈썹만 울던 사람은 선 채로 벽을 안았다 책을 읽으려 앉은 사람은 그것이 춤이라 했고 갖가지의 춤은 뒤통수에 반사되었다

 

   책장 한 켠이 옅게 긁힌다 손톱을 세우고 이루지 않을 메시지를 새겼다 시간은 한 줄로 간다 겁먹을 필요가 없다 온 방향과 다르게 흩어지게 해주세요 차에서 내리세요 내가 잠들 때까지 가지마 한 칸도 뛰어내리지 마세요 먹으라는 것만 먹기로 해 이리 나오세요 방법은 끝이 없어 기도가 통하지 않아 무릎을 꿇어도 돌아가지 않아

 

   전구가 껌뻑인다 바닥에 흘린 구슬을 집어야 할 텐데 발을 가진 사람이 없어서 문제 삼지 않았다 영락을 나서는 사람을 센다 구 구 구…… 약속에 매달려 지체된다 초대를 모르도록 설득하러 왔군요 문이 열렸으나 이미 모두가 돌아갔다

 

 

 

출퇴근기록부

 

 

   아침을 아첨으로 잘못 읽은 날이었어

 

   아첨의 해가 일어났네 온기가 있는 공기를 쓸어 낼 수 없어서 창문은 열지 않았어 빈 눈으로 날씨를 가늠해보자 아첨의 태양이 묻네 나의 입자가 닿았느냐고 두꺼운 외투를 꺼내 입고 현관을 나섰다 온도는 적당했구나

   아첨의 첫 번째 승리

 

   아첨의 거리로 나갔지 호일에 둘둘 말아 산처럼 쌓아둔 아첨김밥 그날따라 맨 아래 김밥을 꺼내고 싶었네 아첨김밥 사장님의 습관대로라면 왼쪽 아첨의 기슭부터 쓰러져야 했는데 그날따라 아첨들은 떼구만 있고 르르는 없이 산은 차례로 깎였고 질서 있게 내려서는 아첨의 김밥들은 느긋했네

   아첨의 두 번째 승리

 

   아첨에 움직이는 사람들을 곁에 두고 걸어보는 중이야 나는 바쁠 것이 없으므로 그들의 어깨를 유심히 보거든 시야에 수십 개 쌍을 이룬 어깨들이 아첨의 빛을 반사하네 아 눈부셔라 아첨의 발광은 무채색 점퍼들에 부딪혀 잔해를 쏘아붙이네 눈이 멀어

   아첨의 세 번째 승리

 

   의자 테이블 콘센트 쾌적한 온도와 화장실에 4500

   커피를 사서 앉았으니 시민의 일원입니다 가방에서 은박지를 벗기면 하나씩 아첨의 김밥을 삼킬 수 있고 아첨의 시간이 남아 있어서 어쩔 줄을 모르겠어요

   아첨의 최종 승리

 

 

박지현 / 경북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책방19호실운영. 2024년 상반기 시와반시신인상 당선.

 

              * 당선작 5편  중 3편씩만 카페에 소개합니다. _카페지기

 

            계간 시와반시202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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