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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24.06.16|조회수4,770 목록 댓글 0

2024문학과사회신인문학상 시 당선작

 

 

모래밭의 나쁜 아이에게 (외1편)

 

   구윤재

 

누가 이 모래밭의 나쁜 아이지?

내가 묻자 풀숲에서 은사시나무였던 은수가 걸어 나온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은수를 보는데 오랜만에 보는 은수는 나보다 한참이나 어린 은수, 어린 은수는 입술이 부르튼 은수. 땅에 오래 묻혀 있던 은수. 머리 사이사이에 어린잎이 자란 은수, 은수를 불러내기까지 내게는 아주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나는 이제 은수보다 세 마디 정도 높은 시선. 은수를 내려다보는 나. 나를 올려다보는 은수. 나는 훤히 내려다보이는 은수를 꼭 끌어안는다.

은수야 너한테서 짙은 흙냄새가 나. 할머니를 두꺼비집에 넣을 때 맡았던 냄새가 나. 세 마디나 더 자란 내게는 은수에게 말할 것이 세 마디만큼 쌓였는데 말할 것이 너무 많아서 이제 네게는 어떤 말도 해줄 수가 없겠구나.

은수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은수라서

나의 품에 가만히 안겨 있다. 은수야 너는 너무 작다. 품 안의 은수를 떼어내 내가 은수의 어깨를 잡고 은수를 본다. 작은 나무 같은 은수. 를 가만히 보면 나는 나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이야기를 잊게 됩니다. 앞에 있는 공만

쫓아가게 됩니다. 속이 상한 내가 은수의 어깨에 배에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준다. 은수의 무릎에 시선을 두면서, 아직도 딱지가 앉지 않으면 어떻게 해. 나는 무릎을 꿇고 손가락에 침을 발라 철봉 매달리기를 했던 날 생긴 피탁지를 떼어낸다. 자꾸만 잎이 떨어지는 너를 어떡하면 좋지. 내가 은수를 올려다본다. 멀리 내다보는 은수에게 은수야, 속으로 부르면 저 멀리서 가장 높은 철봉보다도 큰 은수가 지민아 지민아 울먹이면서 나를 찾아 헤매고 있다.

덜 자란 지민이가 풀숲에서 나와 두리번거리는 은수에게 간다.

 

 

접시 되살리기

 

 

1

 

접시 하나를 상상하자 아이들이 뛰어 들어온다 그러므로 이곳은 박물관인가? 뛰어온 아이가 너덧은 돼 보인다 산만하지만 예의 바른 아이들 큰 소리로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나는 대답 대신 이름이 뭐니? 묻고 저는 승희요 저는 인주요 저는 은재요 저는 은수요 저는 성우요 이름을 다 듣고 나는 한 아이를 지긋이 쳐다보았는데 그건 아이의 이름 내 슬픔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방 어떤 아이가 어떤 이름이었는지 까먹는다 여름에 발그레한 볼을 가진 아이들은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그러니까 얘들아

 

너희 조심해야 한다 접시가 깨지지 않게 해야 한다 하는 순간 접시는 깨진다 희 접시 이 방 한가운데 놓인 접시 모든 조명을 한 몸에 받는 접시 우리 박물관의 유일무이한 접시 평평해서 주말 토스트를 올리기 적당하고 딸기잼 블루베리잼 필라델피아 크림치즈의 맛을 아는 접시 그러나 어떠한 용도로도 사용된 적 없는 흰 접시가

 

산산조각이 난다 이것 봐 내가 조심하랬지! 화를 내면 아이들은 벽과 구분되지 않는 흰 얼굴이 되네? 벽에 딱 붙게 되네? 아이들은 웅성인다 잘 들어보면 죄송하다는 말이다 쭈그려 앉아 깨진 접시 조각을 하나씩 줍는다 안녕 나의 흘러내리는 잼 안녕 나의 가능했던 주말 아침 안녕 나의 유일무이여…… 아이들은 어느새 접시 주변에 모여있다

 

2.

 

빗자루가 필요한데 생각하니 창고가 있었다 빗자루를 들고 돌아오니 아이들은 정말 다섯이서 빼곡한 원이구나 위험해. 저리가, 말하면 아이들은 잠깐 깨졌다가 금방 모여든다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유리 부스러기는 끝도 없이 나오네 저리 가 말하면 몰려드는 애들에게 그런데 너희

 

왜 전부 맨발이니?

 

한참을 이상하다 이상하다 중얼거리는데 한 아이가 저희가 물어드릴게요 말한다 무엇을? 말한 애의 얼굴을 쳐다보는데 저 애의 얼굴은 대장 같네 방금 한 말로 인해 너는 이제 대장 같은 얼굴을 갖게 되엇구나 속으로 생각하면 아이는 먼저 가서 웃고 있다

 

3.

 

대장의 구호 아래 아이들이 한 줄로 섰다

대장은 가운데 붉은 깃털이 박힌 유리구슬 두 개를 줄 테니 한 조각의 접시와 맞바꾸자고 했다 이건 작년 여름에 지구 반대편에서 가져온 인어의 눈물이에요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이름이 반쯤 지워진 축구공과

필통 깊숙한 곳에 숨겨둔 쪽지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 방영되는 저녁 다섯 시를 내게 건네고

 

접시 조각을 얻은 아이들은 온전한 접시가 되어 박물관을 빠져나갔다 주머니 깊숙한 곳의 먼지를 뒤적이는 아이에게도 접시 한 조각을 주어야 하는데

 

너는 이름이 뭐니

 

성우요

 

성우는 뭘 들려줄 수 있니?

 

쟤네가 다 말해서 저는 드릴 게 없어요

 

난처해하면 성우는 어느새 아까보다 창백해진 얼굴로 그럼 저는 저기서 기다릴게요 말하고 성우가 가리킨 곳은 성우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기둥이다 상아색으로 페인트칠된 기둥은 빛이 잘 드는 곳에 있진 않지만 깨끗하고 보송한 느낌을 줘

 

성우는 종종 기둥에 머리를 기댄 채 나를 훔쳐봤다

 

4

 

잊을 만하면 성우의 발밑에서 자꾸 유리 부스러기가 나왔다 여기는 정말 꿈에서 들른 모래사장 같아 나는 맨발의 성우가 다칠까봐 바닥을 쓸고 또 쓰는데 아무리 쓸어도 다 끌어안을 수 없어서

성우를 중앙으로 밀어낼 수밖에 없었다 전시품이 없는 박물관에 서 있는 성우는 날이 갈수록 마르고 평평해지고 성우를 돌려보내려면 하나의 이야기가 꼭 필요했는데

 

덧붙일 조각이 없었다

진열된 시간이 길어질수록 파리해지는

 

성우의 두 발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으면

빛의 모서리를

쥐고 있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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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구윤재

 

​                   ㅇㅇㅇㅇ년 △△ 출생.                     

                   ++++학교 # # #학과 졸업.

                   2024년 《문학과사회》 신인상 시 당선으로 등단.

  

 

   아이들이 달린다.

   장소를 떠날 때마다 떠난 장소에 나의 부분을 두고 왔다는 생각이 든다. 각각의 장소에서 수많은 내가 여전히 자신의 일을 반복하며 순간순간을 살아내고 있을 것만 같다. 이를테면 강가에서. 빛이 물결을 반죽하는 풍경 속에서. 버드나무가 새를 감추는 천변에서. 빈 벤치에서. 아직은 이름이 없는 나의 사랑하는 고양이를 처음 만났던 골목에서. 점심시간의 분주한 카페에서. 아무도 없는 놀이터에서. 모두가 빠져나간 운동장에서. 육교에서. 파편이 되어 내가 더 이상 나일 수 없는 그 어딘가에서. 그들이 존재하고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아이들이 달린다.

   때때로 너무 많은 아이를 두고 왔다는 생각이 든다. 달리면 숨보다 웃음이 먼저 차오르는 아이들에게. 아무도 땅을 외치지 않아서 준비 자세만 반복하던 아이들에게. 이제는 시작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달리는 아이들을 보면 슬프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은 건 슬픔에 잠기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곁에서 함께 뛰는 것. 차오르는 숨이 웃음으로 바뀌는 순간까지. 무한의 장소까지.

   아이들이 달린다.

   함께 달렸던, 달리는, 달릴 모든 이에게 감사하다.

 

 

 

 

[심사평]

 

 

   시를 읽고 쓰면서 점점 드는 생각은 시는 목소리 그 자체라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시를 쓰는 입장에서는 물론이고 읽는 입장에서도 발화자에 집중하게 된다. 누가 말하고 있는가. 왜 그렇게 말해야만 하는가. 목소리에 힘이 생기는 순간은 어떤 식으로 발생하는가. 이런 질문을 손에 쥐고 신인문학상 응모작들을 읽어나갔다. 발화 위치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목소리를 만들어나가는 시에 자연스레 눈길이 갔고 최종적으로 모연지, 황성하, 이순재, 윤수진, 구윤재에게 주목했다.

 

   구윤재의 시를 읽어나가면서는 조마조마한 마음보다 기대하는 마음이 더 컸다. 발화자가 미리 상상한 내용이나 툭 던진 질문이 그다음 문장을 발생시키는 진행 방식이 작위적이지 않고 흥미로웠다. 그다음은, 그다음은 기대하면서 따라 읽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시작점에서 한껏 멀어진 결말에 이르러서는 여기까지 데려와줘서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싶어졌다. 시 속으로 끌어들인 인물들을 끝까지 책임지는 한편 시 쓰는 행위가 언어의 길항작용임을 이해하고 있는 태도에 신뢰가 갔다. 수상자를 정하기까지 오랜 논의가 있었지만 막상 구윤재의 시에 마음을 모았을 때는 그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당선자의 시에서 앞으로 만나게 될 인물들과 그로부터 흘러나올 단단한 목소리가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_임승유(시인)

 

   올해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 부문에도 적지 않은 수의 응모자가 작품을 보내주었다. 언제부터인가 응모자의 숫자에 유독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시를 쓰고자 하는 응모자 수의 변화가 어쩌면 열렬히 시를 읽고 있는 독자 수의 변화를 어느 정도는 짐작게 한다고도 생각했기 때문이다. 올해는 응모자 수가 조금 줄어 아쉽기는 했지만, 예심과 본심의 과정을 거치며 이런 아쉬움이 기대와 안심으로 바뀌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여전히 우리 곁에는 시인이 될 만한 사람들, 그리고 시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로 충분한 듯하다.

 

   본심에 올라온 응모작 중 관심 있게 읽었던 것은 구윤재, 소이랑, 이순재의 작품들이었다. 구윤재의 시가 만들어내는 선명한 이미지들에 호감이 갔다. 감각적으로 뚜렷한 이미지들이 갖는 매력을 오랜만에 확인하게 되는 작품들이었다. 구윤재의 시를 읽으며 누군가에 대한, 어떤 시절에 대한, 미지의 시간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결국 선명한 감각의 기억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소이랑의 작품들은 관념적으로 읽혔다. 그러면서도 한 편 한 편의 작품들이 각각 특색 있게 새롭기도 하다는 점이 놀라웠다. 장미는 여전히도 장미같은 시는 장미처럼 흔하디흔한 시적 소재를 활용하면서도, 그리고 그 단어를 반복적으로 호출하면서도, 어떤 문장도 익숙하게 읽히지 않도록 배치했다는 점이 꽤 흥미로웠다. 자신만의 시적 문법을 잘 다듬어나갈 충분한 잠재력을 갖춘 응모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이순재의 작품들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각 작품마다 다양한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시적 기획이 굉장히 새롭다고 볼 수는 없지만 어쩌면 익숙할 수 있는 그러한 기획을 작위성이 별로 느껴지지 않게끔 추진해나가는 능력이 높이 평가되었다. 작품성만을 놓고 보았을 때 당선작으로도 손색이 없다고 느낄 정도였지만 얼핏 익숙해 보일 수도 있는 시적 기획이 결정을 망설이게 만들기도 했다.

 

   본심을 진행하면서 심사위원들이 가장 많이 나눴던 말은 개성 혹은 새로움에 관한 것이었다. 남다른 시적 재능을 갖췄다고 확신하게 되는 응모자가 여럿 있었지만 한편으로 그들의 작품은 선배 시인의 독특한 분위기나 특정 작품들과 오버랩되어 읽히는 경우도 있었다. 때로는 어떤 문장이, 때로는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나 시적 전략이 특정 시인의 이름을 떠올리게 했다. 이는 해마다의 심사에서 맞닥뜨리는 상황이기도 한데, 사실 기시감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어떤 느낌에 불과할지 모른다. 어쩌면 응모자들의 작품 속에서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장면과 문장들이 더 재빨리 눈에 띄기 때문에 생겨나는 효과인지도. 이제 막 시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딘 위의 응모자들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 세계를 흥미롭게 개척하기를 바란다. 이후의 작업들이 응모자들의 초기작들을 전혀 새롭게 다시 읽게 해줄 훌륭한 준거가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이는 물론 시인만의 몫이 아니라 독자인 우리의 몫이기도 하다. 구윤재 씨의 당선을 충분히 기쁜 마음으로 축하드린다. _조연정(문학과사회편집동인)

 

   *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이희우, 홍성희의 심사평은 생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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