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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문학사상》 신인상 당선작_ 장안아 / 한밤의 벚나무 (외)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24.10.03|조회수631 목록 댓글 0

 2023문학사상신인상 당선작_ 장안아 / 한밤의 벚나무 ()

 

 

한밤의 벚나무

 

그 애는 소화기 함 위에 앉아

벚꽃 잎에 불을 붙였다

뜨거운 손을 털어 내며

어둠의 뒤편을 엿본 표정이다

타고 남은 것이 떨어진다

한밤의 벚나무 아래는

이해하고 싶은 것들이 쌓인다

그 애는

캔 하나를 따서 벙커C유 저장탱크 앞에 둔다

뒤편에서 삼색 고양이가 슬그머니 얼굴을 드러냈다

고양이는 이쪽과 저쪽을 동시에 본다

그 애가 담배에 불을 붙인다

죽으면 빛을 따라간다는데

내 혀끝에도 빛이 하나 달려 있는데

더 큰 빛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고양이는 캔을 핥으며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애를 본다

고양이가 물어다 준 새와 쥐들을

그 애는 저장탱크 옆의 벚나무 아래 묻었다

벚나무는 아름다워졌다

녹색 라이터의 훨을 돌리며 생각한다

이 거대한 단지가 폭발한다면

뿌리째 뽑힌 벚나무들에 휩쓸려

달의 뒤편에 닿을 것이다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졌다 멀어지고

 

벚나무가 한껏 부풀었다

한 움큼 뜯겨 나가는 밤마다

가로등 빛은 꽃잎의 길을 보여 주었다

한밤의 벚나무 아래는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쌓였다

불붙은 꽁초를 주유구 쪽으로 던지면

있을 법한 미래가 나타났다

사라지며

 

그 애는

자전거의 핸들을 잡아 빼

라이터를 집어넣었다

타지 못할 것은 없고

바람이 도울 것이다

핸들을 움켜쥐고 페달을 밟는다

 

 

스윙바이*

 

​​

 

안녕!

나는 수십 개의 안녕과

하나의 울음을 지니고 출발했어

 

혼자 하는 포옹의 날개뼈 모양으로

 

너라는 확신과

너에게서 멀어질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고 있어

 

안녕,

오랜만이지? 별일은 아니고

어젯밤 꿈속에 네가 나왔길래

이런 말을 연습하는 기분으로

너의 날씨와

너의 속도를 가늠하고 있어

오늘 아침에는 마을버스를 놓쳐서

전철역까지 신갈천을 따라 걸었어

파란 하늘에 흰 고래가 배를 뒤집고 있어

위아래 구분이 의미 없는 먼 곳에서

흰 고래가 행성을 이고 가는 것처럼 보이겠지

 

더 먼 곳에선

네가 나에게 오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더 머나먼 곳에선

우리는 하나의 시작으로 보일 거야

이런 사소함이 닿지 않을 거리에서

안녕

너를 흘리고

 

끝을 더듬을 시간 속으로

내던져지기 위해

우리는 기도를 발명했어

 

나는 이제

나를 미지에 걸겠어

 

* 스윙바이 : 행성의 중력을 이용해 탐사선을 가속하는 방법. 54 개국의 인사말과 고래의 울음소리를 새긴 동판을 지니고 보이저호는 항해하고 있다. 태양계를 벗어나 있다.

 

  

물고기와 나무

 

 

 

고요가 고이는 곳에

물고기가 살아

머리와 주둥이가 길며

아래턱이 위턱보다 짧고

한 쌍의 수염이 있지

바닥에 붙어

망각을 먹이로 삼고 있어

 

한 사람이 빠져 죽을 만한 크기의

고요 속으로

바닥을 보이는 찻잔 같은 달이 뜨던 밤

물고기는 솟구쳤어

펄떡이며

허공을 버턴 적이 있어

 

케이에프씨

통유리 밖으로 사람들이 보여

위턱보다 짧은 아래턱을 이편과 저편으로 쉼 없이 돌리고

핸드폰을 손에 쥔 사람은 검은 액정에 비친

한 쌍의 수염이 있는 얼굴을 지웠다 두드렸다

어두워지고

홍대입구역 8번 출구를 서성이는 사람은

머리 위로 기린의 목처럼 뻗은 기타를 메고

물고기의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어

 

물고기의 아가미가 푸르다

등지느러미는 피크로 써도 좋겠어

열 사람이 빠져 죽을 만한 크기의

고요 속으로

물고기는 잠을 자러 돌아가네

긴 잠에 뿌리를 대고

자라는 나무가 있어

나무껍질은 흰색이야 옆으로 얇게 벗겨진다

가지는 자줏빛을 띤 갈색인데 작은 점들이 있어

잎은 어긋난 삼각형 모양으로

가장자리에 불규칙한 톱니를 둘렀어

달처럼 씁쓸한 열매는 끝을 떠올릴 때마다

아래로 처지며 달리는데

깊이가 4cm 정도야

아무도 탐내지 않아

구르는 열매가 있고

원하지 않는 나무가 되고

나무가 나무가 되는 동안

 

숲에 겨울이 온다

물고기가 빈 가지 사이를 헤엄치는 달이 사라진 밤 겨울 숲에 눈이 와 나무를 지운다 나는 지워진 나무에 기대어 길과 나 사이를 본다 나무의 흰 껍질을 벗겨서 손톱으로 꾹꾹 눌러 자국 내는 걸 좋아해 그것은 내가 평생 해온 일이야 한 잠, 두 잠 누르며 멀어지네

 

버려진 열매를 찾아

더 아름다운 껍질을 찾아

나는

 

            ​ ―《문학사상2023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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