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현대문학》 신인추천작 _ 벙커 (외) / 임어지니
심사위원 : 박상수 ⸳ 양안다
벙커
집이 무너졌다 미래를 무너트려서
미래는 오래전 알고 지낸 친구의 이름 같고 우리가 함께 골조 작업했던 주소지 같기도 하지
고층 아파트 올려다볼 때 그 끝에 노을이 매달려 있는 것은 일종의 착시 효과 사람들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고 한다
믿음이 없어도 무엇이든 믿을 수 있고
헤어진 당신이 죽은 사람이라 믿는 것은 더 잘 살아가기 위한 방식 혹은 살아남기 위한, 아무렴 내가 발굴해낸 생존 전략인 것이다
빈 의자 위로 이불 펼치면 미숙한 트라이앵글
그 아래 작은 아지트가 탄생하고 해 들지 않는 그곳에서 먹고 자고 미래에 관해 생각하기로 한다 이대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그런 것을
생각하다 번뜩 무너지면 그건 의자가 넘어져서?
이불에 무언가 묻은 자국 가득해서?
단지 달아올라서 온몸이 붉게 가렵게
집먼지진드기 알레르기라고 했다
이게 제일 어려운 건데 침구를 자주 세탁하고 환기도 자주 하는 것밖엔, 방법이 없는 거네요 영구적인 치료 같은 건, 묻지 않고
일주일에 한 번 빨래방에 간다
지하에 위치한 빨래방은 이토록 좁은데 거대한 세탁기
거대한 건조기 여러 가구의 무수하고 거대한 생활들 돌아가고 있고
어쩐지 생활이란 건 미래의 잔흔 같아서
이삿짐 빠진 거실이거나 공사 터에 떠도는 먼지, 당신이 남겨두고 간 흔적들, 온몸에 피어오른 붉은 반점의 근원지 같기도 해서
세탁을 돌린다 다시 쌓아 올리는 마음으로
보송해진 기분이 들면
매일 조금씩 지어지고 있다고 믿기로 했다
물그림자
드라이브스루 매장에서 햄버거 두 개를 주문했다
감자튀김은 치즈스틱으로 변경할게요 대신 감자스틱 감자스틱 버퍼링 걸린 것처럼 반복하는 나를 보며 친구가 웃었다
일회용 컵 물기를 따라 허벅지가 축축해졌을 때 우리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대신 질주와 음악 소리가 가득한 도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고
가까워졌다 멀어지기를 반복하는 전조등 없는 굉음
그 무렵 친구는 죽은 고양이의 울음소리 대변 냄새 사상유두의 감촉을 떠올리는 일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고 겨우 배가 고팠을 뿐이었는데 그 밤에
도착한 곳은 인공 호수였다
물속 흔들리는 아파트 단지를 보며 친구가 빨대를 씹기 시작했을 때 파동에는 입주자가 없다고 말했지만 그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아 보였다
물속 깜빡이는 호수공원을 보며 친구가 빨대를 삼키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음악을 틀었다 에스파는 나야 둘이 될 수 없어 노래를 따라 불렀다
좁아진 빨대 틈으로 탄산이 역행했다
모두 끝났구나 모든 게 다 끝났어 우리 이제 배부르니까 가자
어두운 배경 속 배기 튜닝된 차량과 도로 위를 구르는 음악 소리를 거슬러
라이트 레버가 움직이지 않았다
만우절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공사장을 지나던 중이었다
우리는 어떤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수 있을까 내가 물었을 때 초코 맛 아이스크림 사 먹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겠지, 하고 너는 대답했고
하천 진입로 사이로 작은 포클레인 한 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로의 목소리보다 밀접한 소음을 들으며 지어지고 무너지고 보수되고 사라지는
우리의 미래도 저곳에 있을까 생각하고
그때 우리는 무슨 맛 아이스크림을 고르게 될까 고민하고
오후 한 시 물비늘이 보이지 않는 밖과 볕을 걸으며 그 모든 일이 과거가 되기를 기다리는 시간
그런데 벌써 여름이 왔네, 응, 그런 줄도 몰랐는데, 포개진 그림자를 따라 흐르는 아이스크림의 끝에는 도색 중인 집들이 빼곡했고
고개 돌리면
“헬멧을 쓰지 않은 사람은 출입할 수 없습니다”
인부의 안내를 따라 짧은 횡단보도를 건너는 동안 이 길이 끝나면 미래라는 것이 금방 올 것 같은 기분 아직 본 적 없는 너의 얼굴을 어쩐지 알 것도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눈을 감아도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그런 꿈을 꾼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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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어지니 / 1998년 창원 출생. 동덕여대 문창과 졸업. 명지대 문창과 대학원 휴학. 2025년 《현대문학》 신인추천 시 당선.
* 《現代文學》6월호에 발표된 당선작은 모두 6편임.
―월간 《現代文學》 2025년 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