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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서정시학》신인상 당선작 _ 최연수 / 천 개의 붉은 방(외3편)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08.12.26|조회수329 목록 댓글 3
2008《서정시학》신인상 당선작 _ 최연수 / 천 개의 붉은 방(외3편)

천 개의 붉은 방 / 최연수



천 개의 타오르는 붉은 방 있다
나는 그 붉은 혀와 입 맞춘 적 있다
초록에서 붉은 방으로 건너온 저 진액의 창문들
덜거덕대며 여름을 난자한 일곱 살 사과나무가
바랜 커튼 속에서 실눈 뜬다
온 들판을 그러잡고 건너던 햇살 당겼다 놓으며
때로 푸른 살 열어 기둥서방처럼
애기속좀벌레를 불러들이기도 했지
객실마다 아침이슬 앉았다 몸 말려간 뒤
알 붉게 허공에 매달려 건너는 길
내가 핥아야 할 저 햇살루즈 밖으로
마음 빼앗긴다면 곧장 천길 지옥행이다
한 때 벌 나비 들락거렸던
자궁은 잊을 것, 사색의 빨판도 몸속으로 거둬들일 것
면벽 백일
눈 부릅떠도 캄캄한 어느 때쯤
노숙의 벌레에게도 넉넉히 자리가 되는
또 다른 生 거푸집, 붉은 방이
어스름 속에 이스트처럼 부풀어오른다
하늘, 막 깨어난 별빛과 눈 맞추며
단물 흥건히 새떼로 퍼득인다 가을밤이 깊어진다
홍로*호텔 천개의 방은 붉다



* 홍로(紅爐) : 스퍼어리블레이즈에 스퍼골든데리셔스를 교배하여 개발한 사과 품종.
껍질은 짙은 홍색이며, 속살이 단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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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의 오카리나* / 최연수



때로는 명사산 골짜기거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따라 온 모래 소리들이
사그락사그락 꽃으로 피어나기도 하는 실크로드,
잠시 글썽이며 아침이슬 노래할 때
물먹은 바람들 일어나 춤추었지 입속에선 모래 바람이 일었어
천장이 사막처럼 활활 달아오르고
운명이란 극명한 순간의 짧은 입맞춤
바르르 떨며 입술을 대는 순간
손가락은 T자형 유두 위에서 자꾸만 길을 잃네
아득해지는 순간에도 구릉 위 한 발 한 발 내디디며
호흡 가다듬는 쌍봉낙타 혓바닥처럼
바람의 흐름 잘 만져 입술 떨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시와 도 사이의 비탈진 길을 오르지도,
수풀 사랑진 골짜기로 내려오지도 못할 것이니
너와 나
생의 능선 오르내리는 비단 할 필의 행보,
어느 사내의 혼 다 삼키고 모로 누운
눈썹달. 月牙泉 출렁이며 흘러 보내는 초라한 샘
저 홀로 아름다울지니
입술자국 닿는 그녀, 곡선 허방진 구멍마다 불꽃으로
피었다 떨어지는 오리온 별빛이
내가 끌고 온 길을 망사버섯처럼 덮고
사막의 배꼽 위 세상의 길들 손금으로 돋아나고


* 아름다운 샘이 있는 마을의 노무라 소지로 실크로드 길, 오카리나 연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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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고도를 가다 / 최연수




일요일,
야크 몇 마리 몰고 가는 카라반 따라가네
불모의 땅 짜블리채카
티브이 속 해설가 목소리는 타박타박 급경사를 오르고 있네
어느 신의 눈물이었을까, 파부예차카 소금 호수
물속의 신전은 수정처럼 반짝이네
유목민 사내가 소금 기둥을 야크 뿔로 깨기 시작하자
하얀 몸 열어 보이는 소금 벽화
불륜의 화인처럼 뒤엉켜 있던 얼룩들
오랜 부스럼딱지 벗기듯 껴입은 세월을 풀어놓네
금간 자리마다 여러 개의 입들이 곰삭은 말들을 뱉어내네
수수만 년 참아왔던 저 소금의 언어는
누군가의 입에서 한 스푼의 꽃으로도 피어날 것이다
한 때 빗방울이었다가, 시궁창 물이었다가 몇 천 개의 음습한 골짜길 품었다가
막다른 길에서 불끈, 티벳 산맥으로 솟구쳐 올랐던
짜디짠 슬픔, 절여져 더욱 싱싱하다
마야부인*이 몸 담갔던 저 호수에 나를 헹구면
오체투지 내 사랑도 영원히 부식되지 않을까
차마고도는 오르지 못하고 티브이만 내 하룰 더듬는
일요일 오후, 실핏줄 같은 고산 잔등 오르내리던 야크,
흙 소금 한 줌에 더 빛나는
수천 개 눈망울이 건조된 내 슬픔을 비디오필름처럼 꺼내 보네


* 마야부인 : 파부예차카 호수에서 목욕하고 석가모니를 잉태했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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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리나 / 최연수



햇살이 고봉으로 담기는 오후
감영공원 앞 등 굽은 한 사내 흙피리 불고 있네
도른도른 뒤척이며 떠도는 노래 알갱이에
손톱에 떠 있던 반달이 낮달로 피어나네
슬며시 눌러 덮는 깜빡거리는 눈
사내의 내장에서 나온 작은 거위 울음소린
빈 깡통 위에 핑그르르 돌다가
비둘기똥과 함께 굴러 떨어지네
슬슬 거미줄을 치며 행인의 마음 재우는 울음
하울링 생긴 홈통 속으로
발자국들 왁자하게 밀려들자 목소리는 윤기가 오르네
열세 개의 구멍에서 뛰쳐나온 그는
봄, 치마 속 기웃거리는 나비처럼 팔랑이며
간간이 행인 주머닐 들썩이네
어느새 깡통 속 햇발 거두어가는 빌딩 그림자
사람들 발걸음 바빠지고
작은 거위 울음소린 바짓가랑이에 채이다
휩쓸려 돌아오지 않네
사내의 주름진 손 깡통 속 더듬거리네
몇 개뿐인 동전
접었던 그림자 주섬주섬 펴며 걸어가네
서산 남은 햇살이 그의 눈을 찌르기 위해 달려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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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 소감] 나방의 꿈


11월의 플라타너스 위로 방제약이 뿌려지고 있다. 저 마르고 비틀린 이파리에 겨우 세 들어 오순도순 가계를 이룬 벌레들에게도 겨울나기는 만만치 않아 보인다. 늦가을 햇살이 눈조리개를 떴다 감았다하다가 뒷짐 진 채 저만치 물러서고 엄마야! 벌레의 집 아이들 비명이 구멍 숭숭 뚫린 창으로 떨어진다.
내 시가 그랬다! 마른 가지에 슬어놓은 벌레의 알처럼 내일이 없어 보이고 가끔은 끔찍한 바람이 시의 나무에서 나를 떨어뜨리려 흔들어댔다. 점차 힘이 빠져 나방의 꿈도 접은 채 말라비틀어진 몸을 팔랑! 던져버릴 참에 불쑥 당선 소식이 날아왔다.

세상과 유일하게 열린 내 소통의 창문에 불을 켜주신 최동호 교수님, 그리고 《서정시학》 심사위원님들께 깊어 허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그 동안 시에 대한 열정만 있는 저를 이끌고 지도해주신 이기철 교수님, 손진은 교수님 고맙습니다. 무엇보다 나락으로 떨어지려 할 때마다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왕언니 장효은 반장님, 영남대 평생교육원, 경주대 문창반 문우들, 모두에게 진 큰 빚 두고두고 잊지않고 갚아 나가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시에 대한 배가 고프다.


▲ 최연수 : 경북 상주 출생. 대구효성여자대학교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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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심 심사평]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작품은 평론 1편, 5명의 시 50여 편이었다. 평론의 응모편수가 많지 않아 시와 함께 심사하기로 한 것인데, 〈시의 위의〉는 `인지의 충격과 강한 시`라는 부제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체계에 맞춰 자신의 사유를 풀어가는 능력이나 대상 작품에 대한 접근과 분석이 유연하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시의 경우, 어휘사용 능력과 구조의 완결성 그리고 대상에 대한 개성적 접근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근영의 〈내 마음의 프리즘〉외 9편은 시와 삶에 대한 진정성이 돋보였으나 이를 섬세하고 자연스럽게 풀어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최정순의 〈달무리〉외 9편은 시적 대상을 드러내는 솜씨와 구조에서 안정감이 있었지만, 대상과 시적 화자 사이의 거리가 일정하지 않아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끼어드는 부분이 눈에 거슬렸다. 김택희의 〈바람이 새기는 말〉외 7편은 익숙한 정서를 능숙하게 풀어내고 있으며, 자아와 세계 사이의 교감을 바탕으로 작은 깨달음을 섬세하게 드러냈다. 그러나 시행 사이사이 어색한 표현들이 끼어들어 긴장감을 이완시키고 있다. 좀 더 수련을 요하는 부분들이다.
배옥주의 〈구름을 수리하다〉외 9편은 개성적인 어법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상력이 돋보였다. 몇몇 시편에서 이미지들 사이의 내적 연관이 풀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띄지만 충분히 극복할 수 있겠다는 믿음도 있었다. 최연수의 〈천 개의 붉은 방〉외 8편은 시적 대상에 대한 관찰이 세밀하고 이를 삶의 이치나 깨달음으로 연결시키는 솜씨가 돋보였다. 시 속에 펼쳐지는 상상력이 인상적이었지만 몇몇 시편에서 보이는 대상에 대한 관습적 인식은 앞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였다.
이상의 장단점과 앞으로의 시적 가능성을 놓고 논의한 결과, 〈구름을 수리하다〉외 9 편을 투고한 배옥주와 〈천 개의 붉은 방〉외 8편을 투고한 최연수를 당선자로 선정했다.
두 사람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앞으로 우리 시단을 이끌어나갈 시인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 최동호(시인. 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신덕룡(시인. 문학평론가. 광주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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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수경 | 작성시간 08.12.26 축하합니다 최연수 시인님...좋은 시로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
  • 작성자somewhere | 작성시간 08.12.27 최연수 시인님 축하드립니다^^
  • 작성자회원 | 작성시간 08.12.28 시상식에 다녀 왔습니다. 오래 갈구하던 열망이 성취를 보던 날, 두 분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더 아름다운 족적 남기시길 곁에서 기원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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