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진 시인광장 선정 2012년 올해의 좋은 시 1000 396
죽은 나무를 위한 아르페지오
강인한
흐르는 저 물길 위에 그대 욕망의 물결이 베일처럼
가벼이 흔들리는 게 보이는가, 술탄이여.
죽은 자들의 그림자 우쭐거리는 밤마다 죄를 머금은
이슬은 사이프러스의 촉수 끝끝마다 별빛을 끌어내린다.
장미꽃이 초록빛 작은 입술을 내밀어 관능의 목을 축이는 밤마다
인간의 슬픈 기원이 들린다. 방울방울
젊은 목숨들 잦아진 곳,
한때는 소리 없이 밤새처럼 한 쌍의 그림자 스며들어
죽음도 무릅쓰는 사랑에 기뻤으매
비단바람이 어루만져 나뭇잎을 환희에 떨게 하였으며
생명의 음률을 스스로 읊으며 분수가 뿜어져 나오게 하였는데
금기를 범하여 처단된 술탄의 여인,
그 사랑하는 병사와 더불어 목이 걸렸고
저들에게 밀회의 장소를 제공한 죄로 나는 뿌리를 잘렸다.
처형의 전말을 목격한 죄로 나는 가지를 잘렸다.
죽어서 이루지 못한
슬픔으로 피는 꽃들의 이름을 아아, 나는 모른다.
그 밤의 천둥 속에서 소스라치던 내 이름도 잊고
몇 백 년 물길은 흘러서
이제는 시간의 흐름도 잊었으니
불꽃처럼 붉은 혀를 날름거리며 먼 데서 깊은 밤 사자들이 배회하고
설화석고 흰 돌에 얼굴을 비추는 벙어리, 물의 정령들이
아래로 아래로 흘러가며 아라베스크의 춤을 출 때면
횃볼에 비친 궁전의 벽은 핏빛으로 어릉지고 있거늘, 술탄이여
나는 다만 눈뜬 채 영원히 사라지지 못하는 한 개 나무토막,
이 깊은 성 안에서 잠 못 드는 영혼들 하염없는 손짓을 기억할 뿐
한 그루 죽은 나무로 나는 여기
불멸의 사랑을 증언하기 위해 아람브라의 정원에 서 있느니.
계간 『시와 미학』 2011년겨울호 발표
강인한 시인
1944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 전북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 196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대운동회의 만세소리〉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이상기후』(1966),『불꽃』(1974),『전라도 시인』(1982),『우리나라 날씨』(1986),『칼레의 시민들』(1992),『황홀한 물살』(1999),『푸른 심연』(2005), 『입술』(2009) 등의 시집과 시선집 『어린 신에게』(1998) 그리고 시비평집『시를 찾는 그대에게』(2002)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