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시인, 진은영으로부터
양경언
1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장면으로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지금 시인과의 인터뷰를 기록하고 있는 제가 스무살 언저리의 나이였을 때 일입니다. 그 시절을 이렇게 문장으로 적는 날이 올 줄은 당시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미래에 저당 잡히는 것이야말로 가장 불우한 현재를 사는 일이라 여기던 때였으니까요. 세계에 대한 불만을 어떻게 표현할지를 내내 골몰하느라 대학 강의실 낡은 창문에 난 금마저 제도가 낳은 상처라 말했던 때, 모든 주어진 자리가 불편하고 어색해서 제출하는 과제 귀퉁이에 ‘왜 선배들은 지금을 안심하며 살고 있느냐’며 무심히 적었던 때.
그 무렵 지은 지 오래된 강의실에서 진은영 시인을 처음 만났습니다. 강의를 시작하기 전에 낡은 교탁에 기대어 고요하게 책을 들여다보던 시인의 낯빛을 기억합니다. 니체와 맑스, 푸꼬에 관한 강의 사이마다 시인은 멕시코나 폴란드같이 강의실로부터 머나먼 어딘가에서 쓰인 시들을 칠판에 적어주었고, 저는 그 글귀들을 받아적으며 깜깜한 세상을 한 줄의 시로 견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하고 고심했습니다. 스무살들이 세상에 던지는 시선을 아무도 눈여겨보려 하지 않을 때 귀를 내어주던 몇 안되는 어른이라고 느꼈던 탓일까요. 저를 포함한 몇몇 친구들은 과제였던 ‘철학 일기’에다가 세계에 대한 불만을 정교하게 쓰는 일에 꽤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우리가 쓰는 글의 유일한 독자였던 시인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눈치도 전혀 살피지 않은 채 실컷 따지고 나서는, ‘그래, 우리는 언제나 가뭄이야’라며 뻔뻔하게 스스로를 변호하기도 했습니다(“사이만을 돌아다녔으므로/나는 젖지 않았다 서성거리며/언제나 가뭄이었다”, 「청춘 1」,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 2003). 그러니까 칼이 될 말들, 용해되지 않아 마냥 뜨거운 말들을 시인에게 잔뜩 안겨주고선, 제멋대로 시인의 시를 든든한 응원군 삼아 행동했던 것이지요. 그래놓고 친구들과 “내게서 제일 멀리 나와 있다”(「긴 손가락의 詩」, 같은 책)는 시구를 나누며 머리보다는 손가락을 쓰면서 살자고, ‘나’만이 아니라 다른 것들을 가리키며 살자고 결연하게 속삭였던 기억도 납니다. 그 시절을 시인의 첫번째 시집에 수록된 「청춘 1」과 「청춘 2」, 그리고 두번째 시집에 수록된 「청춘 3」 사이를 오가던 때라고 기록해봅니다. 종이가 펄럭이며 날아다니는 소리, 떨어지는 붉은 사과들, 눈보라와 박하 향기가 휘몰아치는 이미지가, 혹은 고독의 자처와 객기의 아름다움이 가득했던 그때를 일컬어서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저는 그때로부터 얼마만큼 멀리 와 있는 것일까요? 그 마음들은 제게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요?
더위가 소란스럽게 지속되던 중에 습한 기운이 몰려오던 8월의 어느날 시인을 만났습니다. 끝내 저는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새 시집을 읽는데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어요”라고 고백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시인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명으로서 공유하는 어떤 ‘공통감각’ 때문에, 시인의 세번째 시집에 담긴 언어들이 예사로 다가오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짐작을 보태면서요.
진은영 시인의 세번째 시집이 우리 곁에 왔습니다. 시인은 시집을 내면 복잡한 감정들 때문에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고, 어쩌면 괴롭다는 표현에 해당하는 기분이 든다고 했지만, 저와 제 친구들은 철없이도 시인과 만난 당일에 갑자기 내린 비마저 모두 시인의 새 시집에 대한 환대처럼 느껴진다며 마냥 좋아했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신이 났고, 시를 읽으며 왜 그렇게 눈물을 흘렸을까요. 진은영 시인의 시들은 독자마다 서로 결코 알 수 없을, 혹은 서로 알려고 들지 않는 각자의 장면들과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과 사람이 서로 등 돌리고 있을 때에도 새어나오는 감정과 같은, 끊임없이 번져나가는 이야기 같은 것입니다. 인터뷰를 읽기 위해 창을 연 당신이 별로 궁금하지도 않던 저의 과거를 ‘훔쳐’보고 만 것처럼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한명의 시인과의 만남이기 이전에, 한편의 시 혹은 한권의 시집이 어떻게 서로를 기억하고, 마음을 주고받고, 각자에게 흔적을 남기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너와 내가 아주 모호한 거리에서 만나고 헤어지며/주고받은 말”(「그냥, 판도라 상자」)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2
시인이 『훔쳐가는 노래』(창비 2012)에 수록된 시들을 써갔을 사년의 시간들을 헤아리다보니, 참 이상하게도 그 시간 동안의 저의 모습이 떠올랐고 시인과 처음 만난 시절의 제 모습도 함께 연상됐습니다. 이번 시집에도 역시나 “모든 것은 행동으로 환원되”는 이들의 무모와 뜨거움이, 그리고 그를 감내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지나간 허기”에 대해 “닫힌 대지처럼 굳게 입을 다”(「청춘 4」)무는 청춘들이 등장해서였을까요.
시인은 그런 저에게 시인을 매혹하는 ‘청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아마 나는 너희들에게서 아주 오랜 동안 청춘을 엿보고 훔치고 있었던 것 같아. 조심성 없고 극단적이고 자기에게 어떤 안전망도 만들지 않은 채 대책 없이 괴로워하는 모습들이 매순간 아름다운 시작처럼 보였지. 사실 청춘에 대한 노래는 청춘이 지나간 다음에, 혹은 지나가는 와중에 청춘이 멀어져가는 사람들이 부르는 것. 행동 그 자체로 노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부를 수 없었던 시절, 늘 너희에게 매혹되면서 나는 청춘의 매혹 속에서 살고 있다고 느낀 것 같구나.” 제가 어떤 한 시절의 장면들을 소환하는 방식으로 시인의 시와 마주하고 있었다면, 시인은 가장 조심성 없고 즉흥적인 삶의 순간이자 태도로 ‘청춘’을 바라보며, 거기에 머무르는 방식으로 한명의 독자와 마주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런 기질이 시인과 잘 맞는 것 같고, 시인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아왔다는 말과 함께. 또한 앞뒤 안 가리는 무모함의 결과들이 돌아오는 시기를 요즘 살고 있는데 그것을 견디면서 얼마나 더 스스로가 무모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며, 이를 톡톡히 다 살아내는 것도 청춘이지 않겠느냐는 말과 함께.
그리고 놀랍게도, 시인은 며칠 전 이사를 하려고 물건을 정리하던 중에 최근에 비평가로 등단한 한 친구의 대학 시절 숙제를 다시 들추어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글은 제가 학부 시절 수업시간에 쓴 시인의 첫번째 시집에 대한 비평문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형편없는 그 글을 시인에게 불쑥 내민 용기는 어디서 났었는지 당장 창피해해야 하는데, ‘아, 선생님은 그 시절의 나를 이런 방식으로 기억하고 있었구나’ 싶어 뭉클했습니다. 나라는 사람이 상대에게 기억되고 싶은 방식이 있듯이, 상대도 역시 나라는 사람에게 기억되고 싶은 방식이 있다는 것, 어떤 사물에 대한 이미지는 그 사물이 항상 의도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전달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서 발생하는 불일치가 삶의 한 과정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는 서로가 서로에게 무언가를 “훔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인은 “그 기억의 시간들은 내가 너에게서 훔쳐온 것들로 가득하다”고, “주지 않았는데 가져가고, 주려고 했던 걸 안 가져가고 엉뚱한 것을 가져가는 것은 모두 훔치는 일과 같지 않겠냐”고 했습니다.
「훔쳐가는 노래」를 이 시집의 표제작으로 삼으려 했을 때, 두번째 시집의 제목을 정해주었던 시인의 친구가 이 시의 말투가 다소 위압적이라는 의견을 전하면서 그래도 제목으로 삼을 테냐고 우려했다 합니다. “네 주머니에 있는 걸, 그 자줏빛 녹색주머니를 다 줘/널 사랑해주지 그러면//우리는 봄의 능란한 손가락에/흰 몸을 떨고 있는 한그루 자두나무 같네”(「훔쳐가는 노래」)와 같은 구절을 보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구절들 속에서도 정작 이 구절을 종이에 쓰고 있는 이는 무언가를 안쓰러워하는 마음, 미안한 마음, 연민 같은 것을 품고 있는 것이 함께 느껴져서 시를 오래도록 들여다보게 되는 묘한 마력이 있습니다.
시인은 삶의 가장 강렬한 느낌이 묻어나는 작품이라 이 시를 표제작으로 정했다고 했습니다. 시의 상황을 어떤 여자와 남자의 관계에 국한하여 연상하기 쉽지만, 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삶 앞에서 ‘가난한 아가씨’가 되어버리는 우리 모두에 대한 시라고 시인은 말했습니다. 굉장히 난폭한 종류일 수도 있을 삶에 대해 전달하고 싶었다고요.
어떤 삶의 순간들은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가져갈 때에도 지갑이나 주머니의 내용물만 가져가는 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아예 담는 일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몽땅 다 가져가버리곤 합니다. 삶이 무언가를 훔쳐가거나 빼앗아갈 때의 그 난폭함의 정도는, 완전히 ‘강탈해간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수준이지요. 그리고 삶이 우리에게서 무언가를 훔쳐가는 느낌이 드는 순간, 시인은 거기에 남겨진 자들은 대개 재기불능이 된다고 했습니다. ‘나한테 남은 게 뭐가 있을까’ 하고 외치게 만든다고요. 그런데 이상합니다. 이 약탈과 위협의 순간이 사랑의 순간과도 미묘하게 겹쳐집니다(연애를 할 때 흔히 ‘마음을 훔쳤다’고 표현하는 것을 생각해보세요). 어쩌면 약탈과 위협으로 인해 재기불능이 되는 그 자체가 삶이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일지도 모릅니다. 삶 앞에서 우리는 모두 “운명의 부림을 죽도록 당하고도 급료라고는 슬픔으로 받는 가정부들”인 것이지요. 시인은 이를 전하고 싶었다 했습니다.
삶을 왜 이리도 난폭한 느낌으로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질문에 시인은 우리가 서로의 도둑들이기 때문이라는 답변을 내놓았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주지 않았는데 가져가고, 주려고 했던 것은 안 가져가면서 엉뚱한 것을 가져가는 것은 모두 훔치는 일”이라고요. 언제나 생겨나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의 연쇄를 우리가 삶이라고 부를 때, 그 삶의 감응은 아주 마초적인 것일 테지요. 사실 우리 모두는 ‘조금 더 또는 조금 덜 훔치는 도둑들’로서 살아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시인은 수
줍게 전했습니다. “저는 원래 도둑을 매우 좋아하는 시인이에요. 프로메테우스도 도둑 아닙니까. 불의 도둑.”

삶의 난폭한 느낌을 전하고 싶었다는 시인의 얘기를 들어서인지, 이번 시집에 수록된 「나의 아름다운 세탁소」 「아름답게 시작되는 시」와 같이 시인의 내밀한, 사적인 장면들을 직접적으로 전하는 시들도 혹시 그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이전 시집들에도 가족에 대한 언급이랄지 내밀한 자기고백을 하는 시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첫번째 시집과 두번째 시집에서는 이들이 주로 비유를 통해 구사되었다면 이번 시집에서는 ‘이야기’라고 할 정도로 핍진한 느낌의 시구들로 채워진 작품들이 눈에 띄기 때문입니다. 어떤 시는 간결하고도 강렬한 섬광과 같이 삶의 한순간을 전해주기도 하지만, 어떤 시는 녹진하면서도 꽉 차 있는 방식으로, 그리하여 한꺼번에 밀려오는 방식으로 삶을 전하기도 합니다. 시인의 가족 이야기나 시인으로서의 직접적인 자기고백이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시들이 후자에 해당할 것 같습니다. 시인이 어떤 감정에 사로잡혀 이 시들을 써나갔는지 궁금한 한편, 어떤 슬픔이나 아픔을 자세하게 드러내는 과정이 시인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하지는 않았는지, ‘난폭하지는’ 않았는지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감추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마음의 상처들을 비유로밖에 전달할 길이 없었던 당시를 떠올리며, 상처를 안기는 삶과 마음의 상태가 너무 가까이에 있었던 때였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간결하고, 담담하고, 수다스럽지 않은 삶을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는 있지만 삶이라는 것이 막상 또 그렇게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데다가, 그런 방식만을 간절히 추구해야 하는 것도 삶이 아닌 듯하다고 전했습니다. 미학적으로 세련된 언어를 조탁하는 시들을 많이 쓰는 시간을 살다보니 어느 순간 삶의 그렇지 못한 상황 역시도 자연스럽게 맞이하는 것이 가능하게 됐는가보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굳이 터져나오는 이야기들을 숨길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이번 시집에 실린 「쓸모없는 이야기」가 문예지에 발표된 당시와는 바뀐 모습을 하고 있는 이유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발표된 때와는 다르게 이 시는 ‘자본론’이라는 구절이 추가되어 세번째 시집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밤과 낮/서로 다른 두 밤/네가 깊이 잠든 사이의 입맞춤/푸른 앵두/자본론/죽은 향나무숲에 내리는 비/너의 두 귀”). 시인의 말에 따르면, 발표하기 전에는 포함되어 있었던 구절이지만 막상 발표를 하려니 자신에겐 소중한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안 그럴 수도 있고, 이를 써넣으려는 의지 자체가 강박일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고민이 들었다 했습니다. 하지만 발표했던 시들을 모으고 선별하여 세번째 시집에 수록하는 과정에서 그런 강박을 드러내는 것도 중요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 어쩌면 그 구절은 단순한 강박으로 치환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들여놓았다고 했습니다.
시인은 우리 삶의 난폭한 경험을 너무 가리려고 하는 것 자체가 인위적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전 시집들과 비교했을 때 조금 달라진 점이 보였다고 말하는 제게, 마음이 말하는 대로 써보자는 생각이 시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지 않을까 싶다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편, 그처럼 터져나오는 상처들을 이야기로 쓸 수 있는 순간이야말로 어쩌면 그로부터 멀리 있게 된 증거이지 않은가 하며, 시인은 되묻기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김 뿌린 센베이 과자보다 노란 마카롱이 좋았다/더 멀리 있으니까/가족에게서, 어린 날 저녁 매질에서//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더 멀리 있으니까/나의 상처들에서”(「그 머나먼」)와 같은 시가 선사하는 거리감, 이를테면 우리가 평상시 모른 척 안배하려는 거리감, 완전히 닿을 수 없을 것들, 하지만 닿고 싶은 것들, 닿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닿지 않으려 발버둥치는 것들을 드러내주는 거리감이 우리를 왜 이토록 아프게 휘어잡는지 어렴풋이 느껴지는 듯했습니다. 멀리 있어도, 그것들은 ‘있는’ 것이니까요.

3
‘있다’는 이번 시집에서 첫번째로 배치된 작품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첫 시집에서 맨 앞에 위치한 시가 「모두 사라졌다」이니, 그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가 있다/여기에 네가 있다 어린 시절의 작은 알코올램프가 있다/늪 위로 쏟아지는 버드나무 노란 꽃가루가 있다/죽은 가지 위에 밤새 우는 것들이 있다/그 울음이 비에 젖은 속옷처럼 온몸에 달라붙을 때가 있다
―「있다」 부분
‘있다’라는 말의 반복 속에서 어떤 것의 이탈과 무언가의 창안과 그 사이의 망설임과 사려 깊음이 내내 울리는데, 그 울림이 그윽해서 그런지 두번째 시 「오필리아」를 읽을 때까지 영향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오필리아」의 첫 구절 역시 “모든 사랑은 익사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니까요. 「있다」라는 작품을 맨 앞에 배치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물었을 때, 시인은 모두 사라지는 순간에도 언제나 무언가는 있다고 했습니다. 가령 ‘모두 사라졌다’라는 선언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 선언을 외치는 자가 무언가 찾고 싶은 게 있을 때에야 하는 것이므로, ‘모두 사라졌다’는 선언 역시도 시인이 무언가를 보려는 것이 ‘있다’는 의미로 읽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모두 사라졌다」의 첫 구절은 “위대한 악을 상속받은 도둑들은 모두 사라졌다”입니다. 시인은 그때부터 ‘도둑들’을 보고 싶어했는지도 모릅니다.
시인은 요즘 ‘무언가가 여기에 있었으면 좋겠다’ 싶은 시인 자신의 지독하고 치열한 욕망 이전에, 혹은 그 욕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보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고요. 왜냐하면 더이상 희망이 없다고 홀로 좌절할 때에도, 또 스스로가 완전히 변심해서 예전과 같은 고통이 이 세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참 살 만한 곳이라고 자기기만을 하게 되는 순간에도, 세상의 누군가는 계속 슬퍼하며 싸우고 ‘있다’는 것이 희망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자신의 욕망과 무관하게 살아가고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가능성으로 읽힐 수 있다는 것, 이 모두를 봤으면 하는 마음이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 한심한 일상에 대한 격려” 차원에서, “무뎌지는 자신에 대한 격려와 위안” 차원에서 「있다」를 이번 시집의 첫번째로 배치하게끔 했다고 합니다.
인쇄소의 거대한 소음 속에서/감리 보는 사람에게 소리 없이 시가 새겨진다는 거/내가 너를 이미 떠났다는 거/봄이 오고 구름이 지나가고/꽃들은 시를 떨어뜨리고, 거리에서//어느 한 줄의 문장을 읽을 무렵/붉은 윤전기가 돌아간다는 것/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는 것/어디선가/고요한 침묵 속에서, 모두 떠나간 자동차 공장에서
―「지난해의 비밀」 부분
‘있다’와 ‘없다’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자리에 삶은 있는 것이로구나, 인쇄소의 ‘거대한 소음’ 속에서 찍혀나오는 얌전한 시집처럼, 시가 있지 않을 것 같은 장소에서 실은 시가 움직이고 있고, 그것을 ‘시적’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 것이로구나, 내가 어느 방구석에 홀로 앉아 책의 한 구절에 환해져서 다른 모든 장면들을 망각으로 밀어넣을 때에도 누군가는 윤전기로 그 구절이 새겨진 책을 만들어내고 있고, 때문에 “나 대신 이 세계에 대해 더 많은 것을 희망하는 이들과/나 대신 어두워지려는 저녁 하늘/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검은 묘비들/나 대신 울고 있는 한 여자에 대하여”(「고백」) 우리는 ‘있다’고, 내가 없는 자리에 ‘있다’고 말할 수도 있는 것이로구나. 쓸모없는 것들이라 여겨지는 것들이 환기하는 ‘있다’의 세계를, 시인의 시집을 통해 느낍니다. 더불어 완전히 ‘있다’고 환원할 수 없는 굉장히 소략한 것들조차 세계엔 있다는 것 역시도.
이 시집의 시들을 배치하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처럼 삶의 다양한 국면을 살피려 했다는 얘기를 시인으로부터 전해들었습니다. 시인은 그를 두고 ‘어떤 운동성’이라고 표현했지요. 삶에는 굉장히 고요하고 담담한 순간도 있고 굉장히 거칠고 상스럽고 수다스러운 순간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고요하고 담담한 어조의 시 뒤에 다소 수다스럽고 거친 화법의 시들이 오도록 배치했다 합니다. 고요하게 시작해서 갑자기 수다스러운 얘기로 빠지기도 하고 한창 수다를 떨다가도 짧고 간결한 시를 보여주면서 때로는 삶에 이처럼 산뜻한 순간도 있다는 걸 얘기하고 싶었다고. 가장 개인적인 삶, 내밀한 풍경 뒤에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삶들이 이어지고 포개지면서 우리의 일상은 계속되는 거니까요. 사적이라 여겨지는 구역과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삶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교차하고 반복되면서 이어지는 삶의 리듬, 삶의 운동성. 삶은 그런 것 같다고, 시인이 말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참 성스럽고 순결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참 상스럽고 척박한 국면들, 이 두가지 순간을 사람들이 끊임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고군분투하는 느낌이 곧 삶 같다고 말입니다.
때문에 시인에게 ‘시’란 정말 많은 의미가 포개져 있고, 많은 겹을 이루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가 옹알이를 하고 난 뒤에 말이 진화가 덜 되어서, 굉장히 많은 의미를 함축한 한마디로 의사소통을 하는 언어적 단계가 있대요. 저한테는 시가 그런 것 같아요.” 이는 시를 통해 언어의 깊이를 진중히 고민할 뿐 아니라, 시가 읽히는 현장에 여러 방식으로 참여를 모색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문학적 실험들을 치열하게 진행하고 있는 시인의 ‘시’에 대한 생각입니다. 김수영이 말하는 온몸으로 시를 쓰는 일, 그거, 맞는 것 같다고 하면서 건네던 말 가운데 일부입니다.

4
2012년의 여름, 시인과 만난 그날 저는 많이 설렜습니다. 몇년에 걸쳐서 쏟아낼 법한 말들을 먼저 털어놓고, 머쓱해하며 웃고, 그러다가 저의 말이 또 시인에게 잘못 받아들여질까 초조해하기도 했습니다. 시인의 이야기를 도란도란 듣고 있는 저의 모습이 스무살 무렵의 제 모습과 다른 듯하면서도, 과하게 진지한 측면에선 닮은 듯도 했습니다.
시인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시인에게 기억되고 싶은 방식이 있고, 시인이 제게 기억된 방식이 있듯이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각자의 방식으로 기억할 것이고, 또 그만큼 서로의 말에서, 서로의 몸에서 쏟아지던 ‘빛나는 결정’들을 훔쳐갈 것임을. 다시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저는 이날의 인터뷰를 어떻게 기록하게 될까요. 그때도 여전히 저는 “진실의 비커에 항상 붉은 꽃이 피는 것은 아”(「자스민」)님을 깨닫지 못한 채 많이 울고, 많이 격앙될 수 있을까요. 치밀어오르는 감정의 폭만큼이나 더 깊이있는 사유를 시인과 나누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제 삶의 상처와 직면하는 용감함을 갖출 수 있게 될까요. 그때는 지금과 또 얼마만큼 더불어 있고, 얼마만큼 멀어져 있을까요.
시인은 항상 스스로를 독자라고 하면서, 모든 독자들은 언제나 잠재적 시인이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언젠가 시를 쓰는 사람으로 만날 것이라는 기대를 전하면서 말입니다. 이 창을 열어보는 당신에게 그날 시인의 입술로 전해진 말들을 미처 다 전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리고 제 들뜬 마음 역시도, 시인에게 미처 다 전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가져가길 원했으나 가져가지 않은 그 마음은 여기에 남겨두기로 합니다. 시인에겐 카프카가 죽은 나이와 같은 나이가 되는 해인 2012년, 그리고 우리들에게는 진은영 시인의 세번째 시집을 부드럽게 손에 쥘 수 있는 해인 2012년에 대한 기록을, 때문에 완전히 끝내지 않고 먼 훗날에 다시 열어보기로 합니다.

창/비/문/학/블/로/그 창문 창문이 만난 작가 2012/09/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