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문학사상》 신인문학상 당선작
밤의 모자 (외 6편)
권민자
안부는 도로 입속에 넣어줘
토마토의 色을 빌려주겠니? 가지나 타조의 色 같은 것도
괜찮아?
나의 발은 완전히 몽롱해졌으니
은신시켜놨던 자학이나 꺼내야겠다
엉망진창 울고 있는 얼굴과 불쌍한 어깨는 쓰레기통에 처박고
나는, 폐빌딩에서 나올 법한 동전
내 등짝은 폐빌딩의 문짝처럼 너덜너덜해
나는 나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열쇠와 양말을 챙겼다
밤은 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토마토가 필요했다
토마토처럼
굴러가기 좋은 동전을 폐빌딩에서 발견한 나는
모자 쓴 밤의 모자를 벗기겠다
모자의 얼굴과 내 얼굴을 구분 못하겠다
떨어지지 않는 발과 떨어진 발을 고르고 고르다 할 수 없이
괜찮아지겠다
강의 妻
창백한 밤이야. 나는,
컵 안 가득 모래를 쏟아 넣고. 점점 더
국화의 얼굴. 표정 없는 비누 거품.
더 이상 아끼고 싶은 머리카락이 없으니
당신의 발을 빼앗아야겠어. 그리하여 나는,
자궁 :
고양이 같은 바람과 뱀의 다리와 마늘을 까기 좋은 의자와 부러진 우산대와
한 개의 돌을 넣어서 만든
주머니 :
찰랑찰랑, 찰박찰박, 첨벙첨벙, 추적추적, 허우적허우적,
부사만 들어 있는
나는, 당신에게 가장 추잡하게 들러붙었던 수식어.
없는 발로 내 앞을 가로질러 가는 당신을 바라보며 나는
점점 더 어둠의 방향에 중독되어 가. 순식간에
우울의 중심이야.
다리가 네 개인 불구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인 당신
의 나는, 확산되어 가는 비명.
비명 같은
해파리의 촉수.
해파리의 촉수에 쏘여
혼미해진 물의 눈.
밖에서 나는
그릇이거나 모서리거나 움푹움푹 파 먹히는 기분이다
암고양이의 뱃가죽을 쓰다듬으며 얼굴을 할퀴는 저녁이다
모자를 쓰고 모래가 되고
모래를 쥐고 이구아나의 체온이 되고
발목까지 자란 머리카락은 자르지 않았다
유충이 발견되어도 이상할 것 없는 아름다움과 정말정말 닮고 싶은 어둠과 산양의 눈을
갖고 싶어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발랄하게 웃었다
어쩜 그렇게 새카만 웃음소리일 수 있니?
왜 진심이 아닌 칭찬에도 기분이 좋아지는 거니?
장롱 밖에서 나는 나를 훔쳐 들으며
폐쇄되어간다 숨 막히는데 숨쉬고 있어서
죽음이 나를 껴주지 않는 거라고 생각하는 편이 나았다
비밀
언니의 목소리와 내 목소리는 달라
우린 어쩜 엄마가 다를지도 모른다는 의심 덕분에 싸우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거울을 보면 겨울이 온다
겨울은 다락의 계절
기억하기 싫은 기억들이 꽝꽝 얼어 있어
녹으면 어쩌지?
눈물 흘려야 하나?
쓸 수 없는 건 쓸모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말에
모아두었던 홍콩동전을 하수구에 버리고, 몰래 언니 손을 놓고,
누가 그랬니? 엄마가 일제히 골목으로 몰려왔을 때
나는 끝까지 혓바닥을 입 밖으로 뱉어내지 않았다
왜 그랬니? 엄마가 한꺼번에 입을 열었을 때
선로 밖을 튀어나온 혓바닥들
(내 주머니엔 아직도 말캉말캉한 혓바닥이 가득하니까)
나는 아닌 것처럼 울기까지 했는데
그 일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언니가
지금도 가끔 거울 안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데
소문
예쁜 나를 낳고 싶은 날엔 구름으로 만든 얼굴과 뿔로 만든 충만과
부레와 나쁜 연애와 꼬리가 긴 도마뱀과 다리가 여섯 개인 바람을 옥상 난간에 널어두고
태교에 좋은 베토벤의 운명을 들으며 유리를 깨뜨려 먹는다
내 뱃속에 거꾸로 들어선 너는 다리부터 꺼내져 탯줄이 목에 걸릴 운명
모레와 모래처럼 서먹해
일기장에 거짓말만 적었다
나는, 태양의 뒤편에 있는 그림자, 하수구에서 꺼낸 혀, 혀 같은 항문,
항문의 표정을 요리조리 뜯어보고 있는 내게
“그러면 안 돼”라는 말은 왜 했니?
죽음처럼 말랑말랑한 틈 속에서 나를 꺼내주게?
매일매일 변기통에 앉아서 오늘을 쓰고 가끔이라도 펼쳐보지나 말아줄래?
어제 쓴 오늘을 또박또박 소리 내서 읽어주는 행위는
괜찮다고 어깨를 다독거려주는 너에게 괜찮다고 웃어줘야 하는
불편 같은 것 딸기처럼
달콤한 나는
이란성 쌍둥이처럼 닮은 쌍꺼풀과 닮지 않은 인중을 가진 너를 낳고
(잠시) 암전이다
어쩜 코만 떠다닐 수 있을까
멀리서 보면 코코넛열매
그것이 내 쪽으로 걸어왔을 때 나의 기분은 식탁
알 수 없다는 말에는 만남과 이별의 맛이 섞여 있어
맛있니? 괜찮니?
물음은 자꾸자꾸 증발해
필라델피아, 필라델피아…… 햇빛이 치즈처럼 녹아내리는 오후가 떠올랐다
조심스럽게 먹어도 더러워지는 혀 같은 해가 떠 있어
얼굴을 푹 눌러쓴 모자다
멀리서 보면 파라솔
그것을 향해 걸어갔을 때 나의 기분은 신발
알 수 있다는 말에는 체념과 이해의 토양이 섞여 있어
갑자기 비가 내려도 상관없지?
홀딱 젖은 기분을 뒤집어쓴 풍경이다
그것은 반짝반짝 빛나는 유리조각
“얘, 그것을 가지고 놀면 안 돼!” 호통치는 사람이 있다면
걱정은 고슴도치를 닮았으니
당신의 코는 칼이 되진 않을 거예요!
엄마 뱃속에서 죽은 두 명의 엄마에게
엄마 뱃속에서 죽은 두 명의 엄마에게
거긴 괜찮아? 아직 배는 남아있기로 했어
이제 시간이 외로울 차례잖아
손은 보루네오에 있다 목은 자메이카에
엄마 뱃속에서 나는 가장 활기차게 울었다
뱀에 초록을 섞고 배꼽 위에 얼음을 올려놓고
꽃다발과 구두는 나란히나란히 흐트러지게
탁자 위에 소나기가 내리는 저녁을 올려놓았다
저녁이 내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꼬리 같은 사랑을! 어금니 앙다문 사랑을!
전신주에 걸려 있는 사랑을!
4를 구부려 만든 동그라미는 얼굴이 되지 못했고
펼쳐지지 않는 길 위에 서 있는 배는
가을에서 거울을 끄집어냈다
엄마는 나처럼 바닥과 같은 점괘를 가지고 태어났으니
비어있으면서 닫혀 있는 지문
약간 발랄해진 후회는 쥐약을 먹고
이제 새는 부리로 저녁을 터뜨리는 척 하지 않기로 했다
■ 권민자 / 1983년 포항 출생. 2012년 《문학사상》신인상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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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한 편의 시는 하나의 주견主見을 제시하려는 강한 욕망을 갖고 있다. 그 주견은 때로 단호하고 결단력이 있는 목소리를 통해 드러난다. 그 주견은 대상과 세계와의 조화로움을 꿈꾸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들을 위반하고 부정하려는 성향을 갖는다. 그리하여 ‘시적 화자’는 파괴적 언술을 선택한다.
예심을 통과해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읽으면서 시적 화자에 대해 새삼스럽게 생각하게 되었다. 시적 화자의 취향에 대해서 우리는 시비할 수 없다. 그것은 그야말로 개별적 편향성을 띠기 때문이다. 시적 화자가 비극적 전망을 현시한다고 해서 논란거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시적 화자가 시를 쓴 이와 동일하다고 믿지도 않는다. 시적 화자는 가면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는 한 편의 시를 읽으면서 시적 화자의 심안心眼과 그 심안의 개폐開閉의 정도, 즉 개방성과 폐쇄성에 대해 판단하고 비판할 수는 있다. 왜냐하면 한 편의 시가 독자들을 불러 모으게 되는 하나의 근거는 쾌감에 있을 것이다. 이때의 쾌감은 뭉클함의 체험, 자유에의 높은 의지, 판국의 파괴 등을 통해 얻어진다. 문제는 시적 화자의 심안이 독자의 심안을 닫아걸거나 막아 버릴 경우에 있다. 이럴 경우 독자가 한 편의 시를 통해 얻게 되는 것은 갑갑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시적 화자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심사위원들은「발목의 형성」외 9편을 응모한 김은석 님과「밤의 모자」외 10편을 응모한 권민자 님의 작품들을 최종적으로 논의했다. 당선자 선정을 두고 두 분의 작품들의 경합이 치열했다.
김은석 님의 시편들은 능란했다. 수사적 표현뿐만 아니라 기성 시단의 시적 취향을 모방함이 없는 독특함 그 자체였다. 조직화의 솜씨도 빼어났다. 다만 시적 화자의 고백적 어법이 다소는 사적이었다. 좁고 작은 시의 공간을 앞으로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한번쯤 자문해야 할 듯했다.
반면에 권민자 님의 시편들은 면面이 고르지 않았다. 한 편의 시에도 나오고 들어간 곳이 여러 군데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특질이 마치 활동하는 근육처럼 느껴졌다. 자아를 세계와 대립되는 자리에 위치시키고, 불화와 균열을 통해 자아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노력이 읽는 이로 하여금 오히려 탄성彈性을 체험하게 했다. 시행의 전개가 돌연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관습적인 연상을 벗어나려는 애씀으로 여겨졌다. 무엇보다 시적 진술이 매웠는데 이런 대담함은 신인으로서의 좋은 자질이라고 판단되었다.
오랜 고심 끝에 권민자 님을 신인상 수상자로 결정했다. 열기를 잃지 말고, 치열하게 시세계를 확장해 가길 바란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_ 심사위원 : 권영민(문학평론가), 문태준(시인)
—《문학사상》2012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