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신춘문예(중앙신인문학상문학)로 등단할 때부터 주목을 받은 박연준(朴蓮浚)의 첫시집 『속눈썹이 지르는 비명』이 출간되었다. 1980년에 출생한 신세대 시인답게 시집 전반에 걸쳐 기성세대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대의 감수성을 반영하는 거침없는 어법, 도발적인 시어들을 선사한다. 여성의 몸이나 쎅스에 대해서도 자연스러우면서도 거리낌없이 발언한다. 단지 소재의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세계인식, 시적 사유와 비유 등에서 기존 문법을 파괴하고 화자의 새로운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한 전략의 차원에서도 이 신인의 어법은 단연 돋보인다.
시인은 우선 삶과 세계를 통째로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즉 탄생 자체를 부정한다. 그러므로 ‘더러운 엄마’는 화자를 낳지 말아야 하고, “한번도, 나를 낳지 않았”다고 선언한다(「나의 탄생」). 이러한 부정 때문에 태어나는 것은 사생아들만이고(“아무데서나 불쑥 불쑥 사생아들이 태어났고” 「봄밤」), 태어나는 순간 아기들이 내는 소리는 “죽음들이 생을 뒤집어쓰고 태어나는 소리”이며 “아기는 엄마가 흘린 죽음”(「안티고네의 잠」)이라는 인식이 가능해진다. 이 인식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태아는 “스스로 삶을 버리고”, 생(生)은 실명(失明)한(「밤 11시」) 상태이며, 압사당하거나(「부엌 01:35 a.m.」) ‘도망’치는 것(「낡은 양복을 입은 남자」)으로 묘사된다. 설사 탄생을 인정할 때도, 아이는 ‘싸질러지는’(“나를 싸세요! 빨리!”) 것이고, ‘나’의 탄생은 순결하거나 고귀한 것이 아니라 “엄마의 문란한 질을 뚫고 내가 태어나고” 타인들에게 축복받지 못하며(“사람들이 나의 탄생을 나무라고 있어요”), 어쩔 수 없이 탄생한 나는 “탯줄에 목이 감겨 끌려가”는 것이다(「나의 탄생 2」).
탄생과 삶, 세계에 대한 부정은 자연스럽게 가계(家系)와 부모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삶이 영위되는 집안은 음탕하고, 더럽고 문란한 어미는 ‘비참하게 나부끼는 목각인형’에 불과하다(「타락한 캔디의 독백」). 아버지 역시 딸들이 “구두 뒤축으로 뭉개죽이”는 “걸어가는 내 치부, 죽은 아버지”(「밤 11시」)이거나 눈이 먼 “한 덩이, 어둠”(「안티고네의 잠」) 혹은 ‘한나절도 못 가 금세 죽어버리는 꽃’으로 묘사된다(「앵두와 아버지」).
그런데 한편으로는 시집 곳곳에서 아버지에 대한 애착이 자주 발견된다. 아버지는 “운 나쁜 나의 애인”(「봄의 장송곡」)이면서, “이미 죽은 당신(아버지)이 자꾸 죽을까봐 겁내는” “현기증처럼 피어나는 꽃”(「스물다섯」)인 동시에 화자가 끊임없이 잉태하는 대상(“열네번째 아버지가 몰래 수태되면” 「앵두와 아버지」)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화자에게 계속해서 욕망의 대상이 된다(“당신의 아이는 아니지만/기쁘게,/부풀어올라요” 「달의 상상임신」). 이러한 집착은 단순히 심리적 애정의 영역을 넘어서서 철저한 부정(否定)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엘렉트라(Electra) 콤플렉스를 새로운 방식으로 변주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세계와 부모, 남자 등 모든 대상을 부정하는 이 시세계는 ‘자아’에 대한 부정에 이르면 더욱 처참해진다. 나는 비난의 대상이 되는 부정한 ‘동네 언니’처럼 되길 꿈꾸고, 내 몸은 ‘나쁘다’고 전제하거나(「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나의 ‘스물다섯’은 ‘밑에 깔린 갈보’(「스물다섯」)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러한 자기 부정의 근원에는 화자의 몸, 여성의 몸은 치유될 수 없는 불모지라고 단정하는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자궁은 “갈라터진 한덩이 마른 밭”이고(「발과 자궁」), 늘 비어 있거나 이끼가 끼어 있으며 “당신은 열 달이 지나도 태어나지 않”는 곳이 된다(「나비-마이크에 매달려 독백으로」). 즉, 정상적인 임신과 출산은 불가능하고 늘 유산할 수밖에 없다고 인식함으로써 삶의 고통이 시작된다. 그래서 화자에게 삶은 늘 상상임신과 상상유산으로 가득 찬 것이고, “무럭무럭 늙”어가는 것이며(「얼음을 주세요」), 탈출할 수도 없이 “조금씩, 넓어지는 감옥에 갇히는 일”(「늙은 연둣빛, 터널」)이 되고 만다.
도발적인 화법과 여성의 몸이나 쎅스에 대한 묘사(「흔적」 「얼음을 주세요」 「겨울, 그네처럼」)에서 기존의 여성시인들(김언희 박서원 김민정 등)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평론가 김수이는 시집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박연준의 변별성을 이야기한다.
무의식의 계단을 내려가 욕망의 대상으로서 아버지를 발견한 박서원이 그 아버지를 종교적으로 성화(聖化)하는 길로 나아가고, 김언희가 딸의 욕망을 초점으로 ‘가족극장’을 서술하면서 남성 중심의 폭력적인 질서를 여성의 편에서 해체․전유하고자 했으며, 김민정이 여성성과 모성성을 학습된 것으로 여기면서 그로부터 철저한 분리 독립을 선언하는 데 비해, 박연준은 여성성에 대한 모순되는 태도 속에서 여성성에 대한 재발견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 (이들과) 달리, 박연준은 이를 자신의 시쓰기의 발생학적이며 윤리적인 문제와 등가화한다. 박연준에게 엄마의 자궁에서 아직 완전히 태어나지 않은, 아빠를 밟은 채 죽어가는, 몸 곳곳에 ‘그’의 몸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여성인 자신의 재발견과 부활은 자신의 존재와 등가의 환유인 시의 생산과 정확히 일치하는 문제인 것이다.
“여성인 자신의 재발견과 부활”이라고 김수이가 지적했듯이 박연준의 선정적이고 도발적인 자기부정은 부활과 타자와의 소통을 위한 처절한 역설로 읽힌다. 그의 몸에 대한 사유가 부정적인 것을 넘어서는 강한 생명력으로도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생리하는 바다에 투신하고 싶다/울렁이는 푸른 죽음들에게 발목 잡히고 싶다”(「생일」) 등의 구절에서 느껴지는 역설의 힘은 또한 철저한 부정을 거친 이 시인만이 일구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 역설적인 소통의지는 시(詩)에 대한 시인의 인식에서 아주 잘 나타난다. 이는 자신의 “시가 똥처럼 떨어진다”고 표현하면서 “그런데 너 내가 더럽니?/내 시가 더럽니?”(「詩」)라고 반문하는 것에서도 드러나고, “나는 멍든 심장을 쥐고 시를 쓴다/시퍼런 독을 짜내 멍을 키운다”(「시를 쓴다」)라거나 “가엾은 당신. 내 멍으로, 푸른 멍으로/기르고 싶다”(「껍질이 있는 생에게」)고 다짐하는 대목에서도 이 역설의 미학적 힘은 빛을 발한다. 부정을 넘어 이 젊은 시인이 끝까지 놓지 않고 있는 것은 타자와의 소통을 위해 꺼지지 않도록 지켜야 하는 이 세계의 불일지도 모른다(“아직 남아 있는 불을, 지켜줘” 「별이 박힌 짐승에게」).
시인은 우선 삶과 세계를 통째로 부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즉 탄생 자체를 부정한다. 그러므로 ‘더러운 엄마’는 화자를 낳지 말아야 하고, “한번도, 나를 낳지 않았”다고 선언한다(「나의 탄생」). 이러한 부정 때문에 태어나는 것은 사생아들만이고(“아무데서나 불쑥 불쑥 사생아들이 태어났고” 「봄밤」), 태어나는 순간 아기들이 내는 소리는 “죽음들이 생을 뒤집어쓰고 태어나는 소리”이며 “아기는 엄마가 흘린 죽음”(「안티고네의 잠」)이라는 인식이 가능해진다. 이 인식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태아는 “스스로 삶을 버리고”, 생(生)은 실명(失明)한(「밤 11시」) 상태이며, 압사당하거나(「부엌 01:35 a.m.」) ‘도망’치는 것(「낡은 양복을 입은 남자」)으로 묘사된다. 설사 탄생을 인정할 때도, 아이는 ‘싸질러지는’(“나를 싸세요! 빨리!”) 것이고, ‘나’의 탄생은 순결하거나 고귀한 것이 아니라 “엄마의 문란한 질을 뚫고 내가 태어나고” 타인들에게 축복받지 못하며(“사람들이 나의 탄생을 나무라고 있어요”), 어쩔 수 없이 탄생한 나는 “탯줄에 목이 감겨 끌려가”는 것이다(「나의 탄생 2」).
탄생과 삶, 세계에 대한 부정은 자연스럽게 가계(家系)와 부모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다. 삶이 영위되는 집안은 음탕하고, 더럽고 문란한 어미는 ‘비참하게 나부끼는 목각인형’에 불과하다(「타락한 캔디의 독백」). 아버지 역시 딸들이 “구두 뒤축으로 뭉개죽이”는 “걸어가는 내 치부, 죽은 아버지”(「밤 11시」)이거나 눈이 먼 “한 덩이, 어둠”(「안티고네의 잠」) 혹은 ‘한나절도 못 가 금세 죽어버리는 꽃’으로 묘사된다(「앵두와 아버지」).
그런데 한편으로는 시집 곳곳에서 아버지에 대한 애착이 자주 발견된다. 아버지는 “운 나쁜 나의 애인”(「봄의 장송곡」)이면서, “이미 죽은 당신(아버지)이 자꾸 죽을까봐 겁내는” “현기증처럼 피어나는 꽃”(「스물다섯」)인 동시에 화자가 끊임없이 잉태하는 대상(“열네번째 아버지가 몰래 수태되면” 「앵두와 아버지」)이다. 게다가 아버지는 화자에게 계속해서 욕망의 대상이 된다(“당신의 아이는 아니지만/기쁘게,/부풀어올라요” 「달의 상상임신」). 이러한 집착은 단순히 심리적 애정의 영역을 넘어서서 철저한 부정(否定)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엘렉트라(Electra) 콤플렉스를 새로운 방식으로 변주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세계와 부모, 남자 등 모든 대상을 부정하는 이 시세계는 ‘자아’에 대한 부정에 이르면 더욱 처참해진다. 나는 비난의 대상이 되는 부정한 ‘동네 언니’처럼 되길 꿈꾸고, 내 몸은 ‘나쁘다’고 전제하거나(「속눈썹이 지르는 비명」) 나의 ‘스물다섯’은 ‘밑에 깔린 갈보’(「스물다섯」)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러한 자기 부정의 근원에는 화자의 몸, 여성의 몸은 치유될 수 없는 불모지라고 단정하는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자궁은 “갈라터진 한덩이 마른 밭”이고(「발과 자궁」), 늘 비어 있거나 이끼가 끼어 있으며 “당신은 열 달이 지나도 태어나지 않”는 곳이 된다(「나비-마이크에 매달려 독백으로」). 즉, 정상적인 임신과 출산은 불가능하고 늘 유산할 수밖에 없다고 인식함으로써 삶의 고통이 시작된다. 그래서 화자에게 삶은 늘 상상임신과 상상유산으로 가득 찬 것이고, “무럭무럭 늙”어가는 것이며(「얼음을 주세요」), 탈출할 수도 없이 “조금씩, 넓어지는 감옥에 갇히는 일”(「늙은 연둣빛, 터널」)이 되고 만다.
도발적인 화법과 여성의 몸이나 쎅스에 대한 묘사(「흔적」 「얼음을 주세요」 「겨울, 그네처럼」)에서 기존의 여성시인들(김언희 박서원 김민정 등)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평론가 김수이는 시집 해설에서 다음과 같이 박연준의 변별성을 이야기한다.
무의식의 계단을 내려가 욕망의 대상으로서 아버지를 발견한 박서원이 그 아버지를 종교적으로 성화(聖化)하는 길로 나아가고, 김언희가 딸의 욕망을 초점으로 ‘가족극장’을 서술하면서 남성 중심의 폭력적인 질서를 여성의 편에서 해체․전유하고자 했으며, 김민정이 여성성과 모성성을 학습된 것으로 여기면서 그로부터 철저한 분리 독립을 선언하는 데 비해, 박연준은 여성성에 대한 모순되는 태도 속에서 여성성에 대한 재발견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 (이들과) 달리, 박연준은 이를 자신의 시쓰기의 발생학적이며 윤리적인 문제와 등가화한다. 박연준에게 엄마의 자궁에서 아직 완전히 태어나지 않은, 아빠를 밟은 채 죽어가는, 몸 곳곳에 ‘그’의 몸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여성인 자신의 재발견과 부활은 자신의 존재와 등가의 환유인 시의 생산과 정확히 일치하는 문제인 것이다.
“여성인 자신의 재발견과 부활”이라고 김수이가 지적했듯이 박연준의 선정적이고 도발적인 자기부정은 부활과 타자와의 소통을 위한 처절한 역설로 읽힌다. 그의 몸에 대한 사유가 부정적인 것을 넘어서는 강한 생명력으로도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생리하는 바다에 투신하고 싶다/울렁이는 푸른 죽음들에게 발목 잡히고 싶다”(「생일」) 등의 구절에서 느껴지는 역설의 힘은 또한 철저한 부정을 거친 이 시인만이 일구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 역설적인 소통의지는 시(詩)에 대한 시인의 인식에서 아주 잘 나타난다. 이는 자신의 “시가 똥처럼 떨어진다”고 표현하면서 “그런데 너 내가 더럽니?/내 시가 더럽니?”(「詩」)라고 반문하는 것에서도 드러나고, “나는 멍든 심장을 쥐고 시를 쓴다/시퍼런 독을 짜내 멍을 키운다”(「시를 쓴다」)라거나 “가엾은 당신. 내 멍으로, 푸른 멍으로/기르고 싶다”(「껍질이 있는 생에게」)고 다짐하는 대목에서도 이 역설의 미학적 힘은 빛을 발한다. 부정을 넘어 이 젊은 시인이 끝까지 놓지 않고 있는 것은 타자와의 소통을 위해 꺼지지 않도록 지켜야 하는 이 세계의 불일지도 모른다(“아직 남아 있는 불을, 지켜줘” 「별이 박힌 짐승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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