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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하의 「질문」평설 / 강정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2.08.18|조회수259 목록 댓글 0

박용하의 「질문」평설 / 강정

 

                                                                           들어라, 더 들리지 않을 때까지

                                                                           들려라, 스스로 귀신이 될 때까지

                                                                                                — 박용하 「질문」

 

 

 

나는 나를 평정할 수 있는가

나는 나를 지배할 수 있는가

 

나는 나를 업을 수 있는가

아님 누가 와서 나를 업어줄 수 있는가

 

오늘 아침은 오늘 저녁까지 무사할 수 있는가

울 아버지는 울 어머니를 꽃필 때까지 팰 수 있는가

 

민들레 흰 꽃은 왜 밤새도록 흰 꽃이고

노란 꽃은 왜 하루 종일 노란 꽃일까

 

왜 나는 매년 싹으로 태어나 잎으로 살다 낙엽지지 않는가

나는 왜 열일곱살 때나 마흔아홉살 때나 변한 게 없을까

 

제비꽃은 곁에 있는 제비꽃을 보고 흐느낄 수 있는가

그 꼴을 민들레는 가만히 지켜볼 수 있는가

 

돌은 곁에 있는 돌의 온기를 느낄 수 있는가

과연 돌에는 눈동자가 없고 심장이 없는 것일까

 

제자리에 박힌 돌은 굴러가는 돌의 고통을 알 수 있는가

굴러가는 돌은 제자리에 박힌 돌의 평화를 알 수 있는가

그도 아니면 갑갑함에 진저리를 치며 가속 페달을 밞을까

 

왜 나는 양말 벗듯 말을 바꾸고 지문 없는 악수 공세를 펼치는가

왜 나는 피와 뼈로 말하지 않고 혀로 말하는가

왜 나는 두개골로 말하지 않고 돈으로 말하는가

 

왜 나는 묵직한 돌로 태어나지 않고 끓는 피로 태어났는가

끓는 피로 태어났으면서도 비겁하게 구는가

 

그 티 없이 맑디맑았던 소년들은 다 어디로 멸망해버린 것이며

그 천진무구 소녀들은 어디로 증발해버린 것일까

 

왜 가도 가도 여인의 젖가슴을 벗어날 수 없고

계집의 사타구니를 벗어날 수 없는가

 

왜 내 나라에서조차 나는 외국인인가

왜 이웃조차 나를 집시 대하듯 하는가

 

왜 말에 재갈을 물린 세상과 발랑 까진 말 세상이

근친상간처럼 가깝게 느껴지는가

 

왜 보수와 진보는

배와 등처럼 한 몸에 붙어 있는가

 

우리는 투표기계인가

우리는 세습노예인가

 

왜 하루도 쉬지 않고 야금야금 생은 빠져나가는 것이며

원금만 까먹으면서도 인간은 희희덕거리는가

 

왜 손도 못 쓰고 세월이 가고

빛도 못 보고 세월이 가는가

 

태아 같은 날들?

노파 같은 날들!

 

문신 지워봐야 문신?

얼룩 지워봐야 얼룩덜룩!

 

눈물 지우면 피눈물?

성차별 지워봐야 계급차별!

 

인간적인 것처럼 야만적인 게 없고

왜 인간적인 감정은 비자연적인 감정이 아니고

기어코 반자연적인 감정이어야 하는가

 

왜 무늬만 관계고

말로만 공생인가

 

왜 논픽션만한 픽션이 없는가

왜 가도 가도 인간은 구제불능인가

 

왜 가도 가도 나는 여자인가

왜 가도 가도 첫 남자뿐인가

 

내가 내 피를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나에게 구원인가 재앙인가

 

나는 왜 지금 이 순간에 그토록 목매다는가

나는 왜 아직 나를 용서하지 않는가

 

돌무덤이 된 오빠

휘파람이 된 누이

 

눈물도

피눈물도 여기 두고

 

자작나무가 된 엄마

모래사장이 된 아빠

 

그들은 언제 다시 죽으러 오겠는가

 

                   ― 박용하 「질문」 전문 (『문예중앙』 2012년 여름호 수록)

 

 

  시인은 말한다. 그런데 딱히 말을 하기 위해, 뜻을 전달하기 위해 말을 하는 건 아닌 듯하다.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 그리고 그것들을 형성케 한 삶의 모든 주변적이거나 핵심적인 요소들을 두루두루 둘러보며 터져나오는 어떤 물리적 총체들을 내뱉을 뿐이다. 그러니 그건 딱히 말이 아닐 수도 있다. 말의 형태를 빌린 주먹이거나 침이거나 피이거나 똥일 수도 있다. 분노, 애증, 절망, 비애, 저주, 환멸, 동경 등이 그 안에 다 섞여 있으니 오욕칠정을 다 버무린 육체의 분비물, 삶의 잉여덩어리라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시인이 쏟아내는 ‘질문’들은 애당초 어떤 대답을 요하는 것이 아닌 게 된다. 또는, 답이 없음을 알기에 더 분연하게 속을 긁어내는 반란의 어사요,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족쇄 안에서 본능적으로 몸부림치는 능멸의 제스처일 수도 있다. 그것은 과연 누구를 향하고 있는가.

태초에 박자가 있었다, 라고 말해본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라는 말 이전에. 말이 뜻을 전달하고 말이 사람을 현혹하고 말이 세상을 재구성하기 이전의 더 까마득한 태초. 시간상의 거리론 멀게만 느껴지지만, 누구나 사람이라면, 아니 짐승이라면 본능적으로 몸을 운용하며 우주의 리듬을 타기 위해 몸속에 내장하고 있는, 언어 이전의 발돋움. 그러면서 언어에 의해 재편되고 분할되는 의식과 본능의 통합체. 시인의 ‘질문’은 바로 그 본연의 박자 속으로 몸을 들이밀면서 시작된다. 첫 박은 4분의 4박. 상황은 거울 앞이라 치자.

 

      나는/나를/평정할 수/있는가

      나는/나를/지배할 수/있는가

      (‘/’는 인용자)

 

   “나는”과 “나를”의 분절. 그리고 “평정할 수(지배할 수)”와 “있는가”의 분절. 도합 네 마디. 밋밋한 산문 투로 위의 문장을 읽으면 짐짓 지루하고 척박해진다. 어차피 대답은 준비되어 있지 않다. 사유는 말의 논리가 아니라 박자의 반복으로 나아가고 분열되고 미끄러진다. 자신을 확인하려는 자는, 아니 자신을 능멸하려는 자는 어떤 막막한 진공상태 속으로 스스로를 밀어넣음으로써 서서히 낯설어지는 자신의 현재를 명백히 확인하게 된다. 반복되는 박자는 자아의 망실을 낳는다. 스스로를 잃어버리지 않은 자가 어찌 “왜 내 나라에서조차 나는 외국인”이냐 물으며 “손도 못 쓰고” 가버리는 “세월”의 잔등에서 세상만사의 온갖 부질없음과 조리 없음을 통째로 꿰어내겠는가. 물어도 물어도 속병만 채근할 뿐인 허망한 분투를 이토록 분방하게 소리칠 수 있겠는가. 관건은 질문 자체가 아니라 질문하려는 본능과 그것을 토하는 방식이다. 시인의 ‘질문’은 판단하고 답을 주는 게 아니라 그저 귀로 듣고 귀신에 씌듯 거기에 들려야만 공명이 커진다. “왜 무늬만 관계고/말로만 공생인가”라는 질문에 당신은 과연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 답안을 마련하겠는가. 귀신과 놀려면 몸을 놀려야 한다. 언어의 귀신에 씐 자가 언어로써 그걸 풀려 하다가는 자신의 언어에 목줄을 매달려 허방을 헤매게 된다. 발을 굴러 언어를 털어내고 입과 항문 사이의 거리를 좁혀 폴짝폴짝 뛰어보자. 다시, 이 31개 박자 뭉치를 들고 거울 앞으로.

   시가 나아갈수록 박자는 최초 네 박자에서 섬세히 분열되고 이지러진다. 물론, 이 시가 악보상의 철저한 원칙으로 분절되는 건 아니다. “왜 가도 가도 나는 여자인가/왜 가도 가도 첫 남자뿐인가” 같은 구절은 세 박으로 쪼개질 수도 네 박으로 쪼개질 수도 있다. 여타 구절들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애초에 설정한 리듬머신이 크게 엇나가는 건 아니다. 투투투타 투투투타 또는 꿍따다 꿍 꿍따다 꿍 등 실연 방식은 여러가지다. 언어의 물빛은 태양의 리듬에 따라 농도를 바꾸는 강물의 그것처럼 순연하게 투명하고 야비하게 어둡다. 들었으면 놓아라. 질문했으면 고개를 돌려라. 다만, 하나의 몸짓이 천으로 만으로 갈라져 영원히 끝나지 않을 궁극의 질문들을 다가오는 백지 위에 새롭게 새길 뿐이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영혼이 이승에 두고 가는 “피눈물”의 자취가 되고 삶의 지난한 노역 끝에 대지를 적신 땀방울이 된다. 살아 있는 자들, 끝없이 질문하고 쓰러지는 자들은 어느날 “자작나무가 된 엄마/ 모래사장이 된 아빠”를 만나 세계의 다른 지평에서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된다. 이를테면 “나는/나를/평정할 수/있는가//나는/나를/지배할 수/있는가” 하는 식으로.

   다시 리셋.

   질문은 언제나 하나다. 우주의 리듬도 각기 다른 버전으로 흩어졌다 단 하나의 통일된 원칙 안으로 소환되어 산 자와 죽은 자들을 교합케 한다. “그들은 언제 다시 죽으러 오겠는가”라고? 이 마지막 질문 앞에서 당신은 얼마나 많은 생각들을 낚고 있는가. “그들”은 다만 나 자신이고 당신 자신일 뿐이다. 그저 살려고 오고 죽으려 다시 오는 것뿐. 근엄하게 턱 당기고 훈수 놓듯 대답하려는 자들, 입 닥치고 춤춰라. 그것이 축복임을 모르니 당신의 삶은 여전히 후안무치하고 요령부득한 허망일 뿐이로다.

 

 

————

강 정 / 1992년 『현대시세계』로 등단. 시집 『처형극장』『들려주려니 말이라 했지만,』『키스』『활』 등.

 

 

           —창/비/문/학/블/로/그 창문2012/08/16 10:42 이달의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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