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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세이

박현수의 「위험한 독서」감상 / 권순진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3.04.21|조회수253 목록 댓글 0

박현수의 「위험한 독서」감상 / 권순진

 

 

 

위험한 독서

 

   박현수

 

 

영원히

제자(制字) 원리에 갇히지 않는 문자로

가득한 책

흔들리는 그림자로만 적힌

희미한 구문들이

끝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책

다른 이의

지문이 잔뜩 묻은 서적에

초연하던 예언자,

그의 말처럼 모든 책은

한 페이지의 표지에 불과하리니

허락되지 않은 내용이여

서지학은

얼마나 헛된 학문일 것인가

가장 가까이 있기에

한 번 펼쳐

보았다가 나는 결혼했다

한 번도

독파된 적이 없는 난해한 서적과

 

 

                  —시집 『위험한 독서』(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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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출판사 1977판 세로쓰기『세계사상전집』50권 한 질을 20대 후반에 보급판 특가로 사서 들여놓았다. 온전한 자발적 구매는 아니고 책 외판원에게 안면이 조금 받힌 것 말고도 그의 끈질긴 권유가 작용했었다. 당시 그 책들을 독파하기만 하면 생의 희열과 온갖 세상의 지혜와 삶의 유용함을 다 얻을 수 있으리란 환상을 마구 심어주었기 때문이었다.

   얼마 전 이렇게 시작하는 잡문을 쓴 적이 있다. 제대로 본 게 거의 없는 그야말로 소장본인 이 책들을 눈도 흐릿해져가는데 언제 깨알같은 글씨를 다시 읽어보겠냐는 뜻에서 불편한 독서일 뿐 아니라 '위험한 독서'란 생각마저 든다는 표현을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전에 이 시를 읽었거나 같은 제목의 소설을 어디에서 보고 입력된 단어의 조합을 부지불식간에 써먹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서지학’은 실물로서의 책에 관한 분석적 연구를 하는 학문이다. 책에 사용된 종이와 제본·인쇄·조판 등 책의 물리적 특성을 꼼꼼히 관찰한다. 중세 유럽의 수도원에서처럼 필사하여 손으로 쓰던 시절의 책은 행간마다 지문이 가득했을 것이다. ‘허락되지 않은 내용’들이 쉬 범접을 허용치도 않았으리라. 때로는 ‘잃어버린 성궤의 추적자’가 되어 ‘존스’박사처럼 중절모를 삐딱하게 고쳐 쓰며 살짝 미간을 긁을지도 모르겠다.

   ‘흔들리는 그림자로만 적힌/ 희미한 구문들이/ 끝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책’은 유럽의 성배를 방불케 하고 베니스의 지하무덤을 연상케 한다. ‘한 번도 독파된 적이 없는 난해한 서적과’ 결혼한 그는 영락없이 ‘인디아나 존스’의 ‘존스’ 박사다. 정교한 분류나 하면서 인쇄술의 발명 뒤 양산된 책에 대한 정보나 제공하며 안전한 연구에 매진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꼭 오래되고 지문이 묻어있는 책이 아니라 하더라도 진실을 찾아가는 구도의 과정이 낱낱이 기록된 책이라면 그 근원과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 서지학자처럼 흥미진진하게 탐구하고 명상할 것이라는 태도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시인 자신이 그동안 써왔던 치열한 자기성찰의 시처럼. 그리고 그 난해한 책은 실제로 시인의 아내를 지칭하며 그걸 분석적으로 읽는 것이 위험한 독서일 수도 있겠다.

 

  권순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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