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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세이

진은영의 「시인의 사랑」감상 / 조재룡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3.05.16|조회수252 목록 댓글 0

진은영의 「시인의 사랑」감상 / 조재룡

 

 

 

시인의 사랑

 

   진은영(1970~ )

 

 

만일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는 참 좋을 텐데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너를 위해 시를 써줄 텐데

 

너는 집에 도착할 텐데

그리하여 네가 발을 씻고

머리와 발가락으로 차가운 두 벽에 닿은 채 잠이 든다면

젖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잠이 든다면

너의 꿈속으로 사랑에 불타는 중인 드넓은 성채를 보낼 텐데

 

오월의 사과나무꽃 핀 숲, 그 가지들의 겨드랑이를 흔드는 연한 바람을

초콜릿과 박하의 부드러운 망치와 우체통과 기차와

처음 본 시골길을 줄 텐데

갓 뜯은 술병과 팔랑거리는 흰 날개와

몸의 영원한 피크닉을

그 모든 순간을, 모든 사물이 담긴 한 줄의 시를 써줄 텐데

 

차 한 잔 마시는 기분으로 일생이 흘러가는 시를 줄 텐데

 

네가 나의 애인이라면 얼마나!

너는 좋을 텐데

그녀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큰 빈집이 된 가슴을

혀 위로 검은 촛농이 떨어지는 밤을

밤의 민들레 홀씨처럼 알 수 없는 곳으로만 날아가는 시들을

네가 쓰지 않아도 좋을 텐데

 

 

                                                  —시집『훔쳐가는 노래』(2012)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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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친애하는’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친애(親愛)한다니, 대체 무슨 말인가? 너무나 강렬한 표현은 아닌가. 이 편질 보낸 사람은, 여성이기는 해도 친구였던 터라, 내심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가까이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신기한 것은 그 후 내 마음에 속절없는 흔들림이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그 사람이 만약 내 애인이 된다면, 나는 책을 읽으라고 권하겠다는 식의 생각을 자주 떠올렸지만, 이루어지지 않은 채 그저 가정법 과거완료 형으로 끝나고 말았다. 만약 내가 ‘친애하는’을 계기로 언어의 시원에 있는 누군가를 닮으려고 했다면, 그렇게 매 순간을 그리움으로 마주했더라면 실현되지 않은 슬픔을 적어놓고 체념했던 대학 시절의 완료형을 대신해서 ‘만약’과 ‘~텐데’ 사이에 무언가를 내려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조재룡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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