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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문학리뷰] 이성미 시집『칠 일이 지나고 오늘』/ 양경언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4.01.25|조회수397 목록 댓글 0

[주간문학리뷰]

밤으로 난 철로 위를 지난다, 오늘 나는 자격이 있다.

 

이성미『칠 일이 지나고 오늘』(문학과지성사, 2013)

 

 

글_양경언(문학평론가)

가까스로 오늘

 

한 해가 지나고 ‘오늘’이 되었는데, 그에 걸맞은 새로운 인사를 좀처럼 건네기가 어렵다. 시절을 탓해서만은 안 될 일이라고 스스로 보채기도 여럿 해봤지만, ‘새로움’만이 환영받는 세계에서 이는 감추고 싶은 종류의 마음인 게 분명하다. 넘치는 인사들 속에 홀로 “아무것도 아닌” 자리에 있는 기분. 오늘의 내가 어제까지의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는데도, 오늘 나는 모두가 공평히 부여받는 새로운 시간에 마지못해 안겨야만 하는 것이다. 때마침 밀려오는 당혹감이란 초라한 심경이 된 나의 다른 이름이리라.
가까스로 삶을 이어가야 할 매일의 우리들 곁에, “아무것도 아닌 밤에, 아무것도 아닌 내가, 아무것도 아닌 밤에 대해서…쓴다”(뒤표지 글)는 한 시인의 세계를 두는 일에 관해 생각한다. 이 사건은 ‘아무것도 아닌’ 내가, 아무것도 아니(nothing)라고 ‘쓰인’ 공란으로부터 어떤(something) 읽기를 요청받으면서 시작한다. 이성미의 시집을 나에게 부친다.


 

뺄셈의 가능성

 

마음을 달리 먹어야 한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더하라는(+) 사방의 요구를 거들떠보지 않기로 하고, 차라리 내 주위의 모든 것을 하나씩 덜어내어보기로 한다. 그럼 어떻게 되나. 최후의 그 자리엔 나의 무엇이 남을 것이며 과연 그때의 나는 초라함을 비껴갈 수 있을까. 해마다 이맘때쯤 어떤 이들에게 찾아오는 당혹스러울 만치의 공허함을 다시 바라보기 위해 뺄셈의 형식을 도입한다. 이성미가 그렇다.

 

뺄셈을 계속하니 나만 남았어요.
혼자 먹는 식탁.
연필심처럼 뾰족해지는 저녁.

 

옛날 고독한 왕이 식탁 위로 올라가 춤을 추었죠. 구두를 따가닥거리면
많은 발이 있는 것 같았죠.
식탁이 부서졌지만 계속해서 춤을. 단일한 밤이여, 단일한 공기여.

 

밤에는 검푸른 고등어와 까치만 돌아다녀요.
사과나무에 빨간 전구를 가득 켰어요.
버찌를 먹고 까매진 이빨은 빼버릴래요.

 

뺄셈. 마이너스 부호만 남을 때까지.
뺄셈. 리듬이 태어날 때까지.

 

―「뺄셈의 춤」 부분

 

모래로 쌓은 산의 한가운데에 막대를 세워놓고, 그 모래를 사방에서 걷어내다가 결국 그 막대를 쓰러뜨려야만 끝나는 놀이가 있다. 그 막대를 ‘나’라고 가정한다면, 위의 시에서 ‘나’는 쓰러지지 않고 “연필심처럼 뾰족해”진 채로 “따가닥”거리며 춤을 추는 것 같다. 그 때문에 세계는 ‘나’의 발끝에서 계속해서 분해된다.
어린 시절의 수학책에선 인수분해가 하나의 공식 속에 감추어져 있던 구조를 드러나게 한다고 말했었다. 분해한다는 것, 이는 “단일한 밤”과 “단일한 공기”를 흔들어 칠흑같이 단단한 어둠도 으깨어보면 “검푸른 고등어”나 “까치”와 같이 헤엄치고 날아다니는 존재들을 감추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방식이다. “사과나무”에서 “빨간 전구”가 가득 불빛을 내거나, “까매진 이빨”이 실은 “버찌”의 흔적이었다거나 하는 뒤이은 구절들 역시 사물들 각각의 축적된 이야기가 결국엔 뺄셈의 형식으로 드러나고 있음을 증명한다. 시인의 목표는 걷어내고, 덜어내면서 “단일한” 형태로 보이는 모든 말들을 이루고 있는 파편들을 모으는 것. 하여 분해된 이미지들이 나타나는 자리마다 이들이 삼키고 있었던 리듬마저 태어나게 하는 것. 급기야는 흰 종이 위에 단단하게 뭉쳐 있던 글자들조차 뿔뿔이 흩어지도록 놓아두면서, (쓰는 일이든, 읽는 일이든지 간에) 내 뜻대로 되지 않았던 문장들로 하여금 도리어 내게 다가와 “당신, 어때요?” 하고 안부를 묻게끔 하는 것(“뺄셈의 춤을 느끼는 까만 밤에는 책을 읽었어요./까만 글자들이 방 안을 떠다니며 내게 물었죠./당신, 어때요?” ―「뺄셈의 춤」).
내 주위의 모든 것을 하나씩 덜어낼수록, ‘나’를 이루고 있는 것들의 정체가 드러난다( “납작한 종이 인형이 되어/내부가 사라지려고 한다면/바로 그때부터 나는 나로 존재하려는 의지” ―「납작한 아침」). 그때, ‘나’의 파편들은 각각의 ‘오늘’을 갖고 있는 존재들로서 (감추어져 있었으나) 발견되거나 (몰랐었던 의미가) 태어날 것이다. 어쩌면 뺄셈의 형식이 빚어낸 최후의 자리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무언가가 생성하는 기운이 깃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becoming의 감정, coming soon으로의 여로

 

왜 어떤 것은 무언가가 사라지는 자리에서 탄생하는가. 이성미라면 그것이 ‘오늘’의 비밀이라고 답할 것이다.

 

한 사람이 가자 이어달리기하듯, 다른 사람이 왔다. 그는 가면서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넘겨주었다. 나는 파란 바통이 되어…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칠 일이 지나고…

 

오늘은 일곱 개의 태양이 뜬 날.

 

오늘은 일곱 나라의 언어로 종알거린다.
나는 오늘의 입을 보고 있다.

 

오늘은 주름치마를 입고
시장 좌판을 펼치듯 하루를 펼친다.

 

오늘은 뜨거운 시간, 서늘한 시간, 밝은 시간…
각자 다른 길이와 온도를 가진다.

 

나는 시계 소리를 듣고 있다.
밤이 가까워질수록 오늘은 점점 느리게 간다.

 

오늘은 뒤섞이고, 오늘은 돌기가 있고,
마주 보다가 몸이 멍청해진다.

 

오늘 새벽의 공기는
하얀 스카프처럼 휘감으며 속삭였지.
나를 사랑해도 좋아.

 

― 「칠 일이 지나고 오늘」 전문

 

‘오늘’은 다른 이로부터 넘겨받은 바통과 같은 것이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일은 하나의 바통에 부여된 트랙의 속도와 온도, 공기를 경험하는 것. 그러나 그마저도 매 트랙마다 리셋되는 것이 바통의 운명이다. 더군다나 “나는 파란 바통이 되어…”에서 ‘오늘’이라는 ‘바통’은 곧 ‘나’와 같다 했으니, ‘오늘’은 매일매일 “오늘”이고, ‘오늘의 나’는 매일매일 ‘오늘의 나’일 것이며 또한 ‘나’는 매번 차이가 생성되는 ‘나’일 수밖에 없다. 오늘을 제외한 날들이 사라진 자리에 도래한 ‘오늘’이라는 윤곽은, 바로 그 사라짐이 남긴 강렬한 빛을 통해 밝혀지는 것이다. 그러니 누가 감히 오늘을 단정하는가. 오늘은 언제나 처음에 이르는 삶의 현전이다.
한 해가 지나고 ‘아무것도 아닌’ 기분이 들어 공허하다고, 내가 그랬던가. 그와 같은 공허함이라면 타당하다. “각자 다른 길이와 온도를 가진” 오늘(들)이 매번 처음이자 단 한 번의 유일함으로, 삶에 도사리고 있는 잔혹한 우연성을 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얀 스카프처럼” 나를 “휘감는” 막막함과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나의 초라함은 오늘을 예비하는 당연한 심경이다. 공허함은 생성(becoming)에 앞선 감정이자, “완성되지 않은 이야기”를 향해 열려 있는 여로의 예행이기도 하다(“오늘의 문짝에 바싹 귀를 붙이고 있는, 내일 아침의 공기들. 문이 열리면 쏟아져 들어오겠지. 지금 문짝은 오로지 팽팽하게 버티는 데 몰두해 있고.//완성되지 않은 이야기들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 흩어지고.” ―「일요일 오후 네 시」 ). 그리고 어쩌면 거기에 깃든 아주 잠깐의 섬광 같은 것으로 자칫 아무도 듣지 못할 수도 있을 음악을 연주하듯 이어가는 게 곧 지금 여기의 삶일지도(“사라져가는 것들로/너는 음악을 만들고 있어.//아주 잠깐 들리는 음악./우리가 들을 수 없을지도 몰라.” ―「잠깐 들리는 음악」).


 

오늘 우리에겐 자격이 있다

 

날마다 새로워져야 한다는 강박의 과잉으로 상태의 악화를 초래하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의 ‘오늘’이 되어가는 과정의 캄캄함에 몸을 싣는 일을 두려워 않기로 한다. 시의 일부를, 너에게 부친다.

 

네가 부르는 노래는 눈 덮인 하얀 철로.
나는 기차에 너를 싣고 달린다. 칙칙폭폭 소리를 내기 위해서
밤으로 난 철로 위를.

 

기차는 터널로 들어간다.
짐승들은 터널에서 맘껏 운다.
너는 자격이 있다.

 

― 「호른과 기차」 부분

 

매일매일 ‘오늘’을 맞이하는 일은 마치 밤으로 난 철로 위를 지나는 일과 같다. 때로는 까마득한 터널을 통과하기도 해야 할 것이다. 다행인 것은 이것이 너뿐 아니라 내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점이다. 기차가 “너를 싣고 달린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nothing). 그러는 한편, 나 역시도 너와 함께 오늘을 마주하고 있다. 이것은 무언가(something)를 예고한다. 두렵지만, 두려워하지만은 않기로 한 오늘 우리에겐 자격이 있다. 이성미의 시에서 자주 눈에 띄는 마침표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지나온 길마다 마침표(‘.’)를 찍는 일에 최선을 다해도 된다. (지나온 길에 남겨진 발자국과 같은 ‘마침표’는 마침내 지워질 것이고, 우리 역시 그리되리라. 그리고 그 위를, 또 다른 누군가가 곧 지나가리라.) 너에게 혹은 나에게 여태 보내지 못했던 새해 인사를 이것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 부디, 내내 공허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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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언 

1985년 제주 출생, 2011년 《현대문학》문학평론 부문에 「참된 치욕의 서사 혹은 거짓된 영광의 시 : 김민정론」이 당선되어 등단. 

 

이성미

1967년에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이화여대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2001년 『문학과사회』에 시 「나는 쓴다」외 3편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시집으로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칠 일이 지나고 오늘』이 있다.

 

                 출처 : <문학과지성사> 홈페이지  [주간문학리뷰] 2014.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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