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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세이

그해 5월 27일 새벽의 목소리, 자작시 해설 '카인의 새벽'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4.05.18|조회수330 목록 댓글 2

그해 5월 27일 새벽의 목소리

 

   강 인 한

 

 

 

   오월입니다. 아카시아 꽃이 하얗게 피는 계절.

   그해 5월 우리는 광주에 살았습니다. 전남대학교 농대 뒤쪽에 있는 새마을, 서구 용봉동 696-32번지. 내 손으로 처음 장만한 집이었습니다. 대지 33평에 건평 18평 이태리식 주택이라던가 그랬지요. 대문 우측 문설주에 내 이름을 새긴 문패를 달고 얼마나 흐뭇했는지 모릅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우리 내외는 병아리 같은 아이들 셋을 데리고 살았습니다. 우리 집에서 직장인 S고등학교까지는 걸어서 십오분 정도 거리였습니다.

 

   1980년 내 나이 서른일곱. 그 전 해에 고정희, 국효문, 김종, 김준태, 송수권, 허형만 등과 함께 우리 젊은 7인은 《木曜詩》동인지 2집을 냈지요. 큰딸이 초등학교 2학년, 가운데 장남이 유치원생, 막내딸이 다섯 살이었을 것입니다. 5월 18일 오후 시내에 나갔다 돌아온 아내가 무서운 얘기를 들려줬습니다.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몽둥이를 들고 대학생 아이들만 보면 마구잡이로 붙잡아 두들겨 패는데 피가 터져도 아랑곳하지 않더라고, 그런 광경을 시내버스를 타고 오며 보았다고 했습니다. 전날 밤만 해도 금남로에서 대학생들이 횃불시위를 벌였어도 행진을 마치고 거리의 쓰레기까지 말끔히 청소하였다는 말을 들었는데……. 공수부대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대학생만 눈에 띄면 끝까지 뒤쫓아 가서 흠씬 두들겨 팬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집집마다 대학생 아이들을 지하실로 어디로 숨긴다고 야단이었습니다.

 

   시외전화가 불통이 되어버렸습니다.

  광주역에 들고 나는 열차도 끊어져버리고, 버스도 끊겼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시내 전화만 숨통을 트이게 통화가 가능했습니다. 그로부터 광주는 완전히 외부와 고립된 내륙의 한 개 섬이었습니다. 물론 시내버스도 다니지 않았으므로 무슨 소식을 듣기 위해서는 시민들이 많이 모인 금남로 분수대 부근까지 가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자전거로 혹은 도보로 가는 도리밖에 없었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이던가, 금남로에서 시위대와 공수부대가 대치한 가운데 시민들을 향한 최초의 조준 사격이 가해졌습니다. 그 당시 시위 군중이 30만 명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이후 택시부대의 도청 진격이 있었고, 파출소 무기고에서 너도나도 총기를 찾아낸 시민들은 무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수부대가 시 외곽으로 퇴각을 하고 시내 치안은 시민군들이 자발적으로 맡아서 돌보게 되었지요. 부상당한 사람들에게 병원에서 헌혈하는 여학생이며 시민군들에게 주먹밥을 나눠주는 젊은 아낙들이며…….

 

   광주에서 벌어진 이렇게 처참하고 야만적인 참상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텔레비전에서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중계하고 태평할 뿐이라서 얼마나 분통이 터질 지경인지 몰랐습니다. 도청 앞 상무관에는 차마 눈으로 보기 어려운 참혹한 주검들이 관 속에 들어 있고. KBS도 MBC도 모두 거짓말만 앵무새처럼 뉴스라고 방송하고 있었습니다. 금남로에서 가까운 MBC 사옥이 불타게 된 것도 조작된 허위 사실만 보도하는 데 격분하여 시민들이 화염병을 던져 불지른 결과였습니다.

   이따금 하늘에 높이 뜬 비행기가 선무방송을 하는 소리가 아스라하게 들렸습니다. 저런 방송이나 삐라를 뿌리는 게 아니라 저런 비행기에서 광주 시내에 폭탄을 투하한다 해도 우리 시민들은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겠구나, 그런 공포와 절망이 실감되었습니다. 우리가 외부와 고립된 채 여기서 무참하게 학살된다 해도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고 개죽음으로 끝날 건가, 그게 너무나 원통하고 분할 뿐이었습니다.

 

   5월 27일 새벽.

   다급하고 앳된 젊은 여성의 목소리가 가두방송으로 들렸습니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시내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차를 타고 다니며 방송하는 그 목소리를 막 잠결에서 깨어나 듣는 순간, 무서운 탱크의 굉음도 묵직하게 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아, 어쩌나, 차마 밖으로 나가볼 수도 없이 비겁한 자신이 부끄럽고 죄스러워서 그 새벽 울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라디오를 켜자 경쾌한「콰이강의 행진」이 당당하게 들려나오고 ‘지금 폭도들을 소탕하고 있으니 시민 여러분들은 집 밖으로 절대 나오지 말라’는 무서운 경고 방송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낮게 떠서 날고 있는 요란한 헬리콥터 소리에 섞여 몸서리쳐지는 총소리, 총소리…….

 

   그로부터 34년이 흘렀습니다.

   그 새벽 광주 시민 모두가 가두방송이라고 들었던 여성의 목소리, 그 주인공이 밝혀진 기사를 대하고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그 당시 전남대 사범대 음악교육과 졸업반이었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올해 56세라는 신문기사를 대하며 나는 세월의 무상을 느낍니다.

  1980년 5월 27일 그 새벽의 뼈아픈 자책과 어쩔 수 없이 비굴한 심경을 눈물로 쓴 졸시 한 편, 아래에 다시 옮겨봅니다. 시집『칼레의 시민들』은 그로부터 12년 뒤에 낸 시집이지만 살아서 빚진 자의 심정으로 고스란히 '5월 광주'만을 기록한 시집입니다.

           

    (2014/05/18)

 

 

 

카인의 새벽 / 강인한

 

 

 

새벽이었다.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소리

전차의 캐터필러 소리

소리에 소리가 섞이며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투항하라, 투항하라, 투항하라,

눈이 시린 하늘 하느님보다 높이 뜬

군용 비행기에서

아카시아 꽃잎 같은 전단이 떨어져내려

피레네의 성을 빠져나간 이웃은

이 새벽 저 소리를 들었을까.

 

쥐새끼처럼 처참하게

옆구리에서 창자가 삐져나와 죽어버린

젊은이의 얼굴은

온통 페인트로 회칠돼 있었다고

말해 주던 친구도

그 새벽에 울고 있었던 것을.

 

라디오에선 ‘콰이강의 행진’도 경쾌한

오월의 새벽.

 

밤이면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아흐레 동안을

우리가 기다린 것은

빈주먹이나 불끈 쥐어 보는 아 허망한

한 줌의 비겁,

소리 없는 눈물이었던가.

 

이윽고 문 밖 어디쯤에서

피보다 검붉은 총성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국민학교 담벼락에

붉고도 붉게 장미꽃이 피어난 것을

며칠이 지난 뒤

살아남은 우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무심히 지나쳐 갔다.

 

                  —시집『칼레의 시민들』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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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조선미 | 작성시간 14.05.23 중학생이었던 그 때, 제주도는 계엄령 선포 지역이 아니었고 선생님이 북한 간첩들이 선동한 반란이라고...
    조그마한 단발머리 소녀들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유언비어라는 단어도 그 때 처음 들었습니다.
    그 중 유언비어로 알고 있던 내용 하나는 북한 간첩들이 아기를 가진 여인의 배를 갈라 처참하게 죽였다는 말이 기억납니다.
    훗날, 성인이 되고도 한참 지나서 대한항공 기장으로 계셨던 지인의 실제 이야기를 듣노라니 제주 4. 3 참변만큼이나 가슴 아픈 역사였던 사실을 알았습니다T-T
    '' 글에 포함된 스티커
  • 작성자강인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5.23 직접 그 역사의 현장에서 산 내가 당시의 유언비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건 고도의 군사 작전에서 나온 기만선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한 가지 예로 "임신한 여인의 배를 갈라 죽였다더라."는 것. 다만 "전남고 영어 선생님의 부인인, 임신한 최미ㅇ 여인이 자기 집 골목 안에서 공수부대의 M16 사격으로 두개골이 부서져 죽었던 사실"이 있었는데 그러한 사실을 끔찍하게 윤색을 해서 '공수부대가 임신한 여인을 죽였다'는 근본적인 사실마저 은폐하려는 작전의 구사라는 것. 당시의 유언비어에 대한 제 추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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