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못, 존재의 심연
—김종철 작품론
이 숭 원
못
김종철은 ‘못’의 시인이다. 못의 시인 하면 김종철이 떠오르고, 김종철 하면 못의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못에 관한 명상》(1994)의 〈자서〉에서 ‘못의 사제’가 될 것을 약속하며 못에 관한 5부작을 완성하고 시를 끝낼 것을 다짐하였다. 그 후속 작업으로 낸 시집이 《못의 귀향》(2009)이다. 시작의 연보로 보면 ‘못’에 대한 탐구는 40대 중반 이후 나타난 것으로 되어 있다. 인간이 불혹을 지나 지천명을 향해 가는 나이에 이르게 되면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더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이런 점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더 많겠지만, 문학을 창작하는 사람들은 이 주제의 탐구가 사실은 평생의 화두가 된다. 김종철 시인 역시 생애의 전환기에 인간 존재와 인간의 삶의 방식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그것을 신앙이나 종교적 실천의 문제와 결부지어 성찰하게 되었고, 그에 대한 문학적 결실이 못 연작으로 집약되어 나타난 것이다. 다음의 시가 그를 명실상부한 못의 시인으로 부각시킨 대표적인 작품이다.
못을 뽑습니다
휘어진 못을 뽑는 것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못이 뽑혀져 나온 자리는
여간 흉하지 않습니다
오늘도 성당에서
아내와 함께 고백성사를 하였습니다
못자국이 유난히 많은 남편의 가슴을
아내는 못 본 체하였습니다
나는 더욱 부끄러웠습니다
아직도 뽑아내지 못한 못 하나가
정말 어쩔 수 없이 숨겨 둔 못대가리 하나가
쏘옥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고백성사―못에 관한 명상 1〉 전문
한용운의 ‘님’이 여러 가지 상징성을 지니듯 여기서의 ‘못’도 다양한 의미의 층을 거느리고 있다. 삶의 고민과 상처라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고, 살아가면서 저지른 잘못이나 죄의식의 의미로 풀이될 수도 있다. 상처와 죄를 없애려는 인간의 노력을 의미할 수도 있고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숙명적 원죄의식을 상징하기도 한다. 사람에게는 자기만이 간직하고 있는 비밀이 있다.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할 고백성사에서도 털어놓지 못한 최후의 그 무엇, 최후의 순간까지 끝내 감추고 싶은 비밀의 암호, 그러나 자신의 내면에는 여전히 박힌 못으로 남아 자신의 양심을 아프게 찌르는 그 익명의 존재.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비밀상자 한두 개를 가슴 깊이 사려두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란 오묘한 존재의 보편적 특성인지도 모른다. 시인은 일상적인 종교 생활을 이야기하는 평범한 어법을 통해 인간 본성의 미묘한 특징을 은밀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 시에 나오는 ‘휘어진’ ‘오늘도’ ‘더욱’이라는 세 개의 시어 역시 독특한 의미 작용을 하고 있다. 못이 휘는 것은, 박을 때 잘못 박았거나, 시간이 많이 경과되어 형태의 변형이 생겼거나, 뽑아내려 했는데 제대로 뽑히지 않은 경우에 생긴다.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은 크고 작은 잘못을 저지르는데, 그 잘못을 바로 고치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놓쳐 아쉬운 기억으로 가슴에 묻어둔 채 세월을 보내는 수가 많다. ‘휘어진 못’은 그러한 인간사를 비유한 말이다. 지금 시인은 휘어진 못을 뽑으려 하는데 못이 휘어졌기 때문에 뽑혀 나온 자리에 지저분한 흉터가 생긴다. 이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적 인식을 통해서도 그 상처가 완전히 치유되지 않으리라는 안타까움을 나타낸다.
‘오늘도’는 자신의 속죄가 하루 이틀에 끝날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그렇게 지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여기에는 세상의 작은 상처나 오점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것을 정화하려고 하는 시인의 예민한 자의식이 도사리고 있다. “못자국이 유난히 많은 남편의 가슴”이라는 말은 민감한 자의식의 광선에 투영된 내면의 형상을 나타낸 표현이다.
‘더욱’이란 말도 이와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 못 자국이 유난히 많은 남편의 가슴을 보고도 못 본 체하는 아내의 태도에서 그는 ‘더욱’ 심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숨겨둔 못대가리 하나”가 가슴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내의 너그러운 태도 때문에 깊이 감추려 했던 못 하나가 스스로 고개를 내민 것인지도 모른다. 요컨대 김종철 시인은 날마다 못을 뽑아가며 살고, 못 자국이 유난히 많은 것 때문에 부끄러워하고, 끝내 드러내지 못하고 숨겨 둔 못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괴로워한다. 바로 이런 의식의 흐름 때문에 그는 ‘못의 사제’가 될 생각을 한 것이다.
못의 기원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고 《전도서》 1장 9절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이 새롭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있었던 것이며 사람들이 새롭게 이룩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김종철 시인이 ‘못’의 주제를 탐구한다고 하는데 그것 역시 어느 날 문득 솟아난 것이 아니다. 그의 창작의 역사 저편 초기 작품에 이미 그 싹이 조용하게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가령 그의 초기시 〈야성(野性)〉에 나오는
온 집안의 황폐한 지병들은
어둠 저쪽에서 못질된
몇 개의 눈물 위에 골격을 드러내고
라든가, 〈겨울 변신기〉에 나오는
파랗게 떨고 있는 당신의 지난 상처를 못질하고
잘 손질된 은화의 세례를 쩔렁이며
매일 밤 유다처럼 한 잔의 포도주로 목젖을 식히고
목매다는 시늉을 했다
같은 구절에 못의 이미지가 뚜렷이 나타나 있다.
이 못의 이미지는 부정적 상황에 얽매여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동결과 구속의 정황을 환기한다. 시인은 ‘못질’에서 환기되는 금속성의 유폐감을 활용하여 생명의 자유를 억압하는 상황의 냉엄함과 비정함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못의 이미지는 여기만이 아니라 그의 초기시 여러 편에 다양한 형상으로 산포되어 나타난다. 그러한 시행을 눈에 띄는 대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황폐한 바람이 분다
마른 뼈의
골짜기들이 떼지어 내려온다
―〈죽음의 둔주곡 ― 一曲〉에서
위생병 위생병 위생병인 내가 절망을 핀셋으로 끄집어낼 때
그대는 더 많은 파멸과 비탄을 삼켰다
―〈죽음의 둔주곡 ― 四曲〉에서
당신의 마른 구원의 눈썹이
정글 속 가시보다 모질고 독한 것을
(중략)
나를 뚫고 산을 뚫고 망우리를 뚫었습니다
나는 혀가 아리도록 김치를 씹었습니다
―〈죽음의 둔주곡 ― 八曲〉에서
그대의 마른 아픔은
서울의 복부에 말뚝을 박고
나는 그대의 가랑이에 숨겨 놓았던
산고(産苦)의 아이가 된다
―〈서울의 불임(不姙)〉에서
떨어져 나간 언어의 잔뼈마다
의식의 핀을 꽂고
개인의 균형을 비끄러매요
나의 바른쪽 눈알에
정확히 들어와 앉아 있는 나사의 구조를
비집고, 비틀거리며 나가는 그의 질서
―〈시각의 나사 속에서〉에서
20대의 시작인 이들 시편에 나오는 ‘마른 뼈’ ‘핀셋’ ‘가시’ ‘말뚝’ ‘핀’ ‘나사’ 등의 시어들은 어떤 대상에 구멍을 내어 그것을 고정시키거나 속에 있는 무엇인가를 뽑아내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 시어들은 황폐함, 파열, 비탄, 모질고 독함, 아픔, 분해 등의 어사와 연결되면서 자아의 고뇌와 개인의 상처를 드러내는 표지물로 작용한다. 그런 점에서 이러한 시어와 이미지들은 그의 40대 이후의 시에 나오는 못과 상통하는 의미 내용을 지닌다. 따라서 그의 못 시편은 어느 날 우연히 출현한 것이 아니라 그의 초기시부터 이어져 오던 존재 탐구의 경향이 ‘못’이라는 구체적이고 상징적인 사물로 집약되어 시적 형상성을 획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모성 지향과 종교적 경건성
그의 중기 시의 못과 초기 시의 못 이미지를 구획하는 중요한 요소는 종교적 경건성의 유무다. 앞의 〈고해성사〉에서도 보았지만 중기시의 못은 가톨릭 신앙이나 불교적 사유와 연결되어 형상화된다. 그러한 종교적 후광은 못의 시가 존재 탐구와 인생 탐구의 시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초기시에서 종교적 색채가 드러날 때는 성서의 잠언이나 시편의 어법을 취할 때가 많다. 청춘기의 시에는 고뇌가 전면에 노출되어 있어서 종교적 경건성이 하부로 잠복하는 경향을 보이는데, 어머니와 결합되어 등장하는 경우에는 예외 없이 종교적 신성성이 작품의 배면에 비쳐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머니는 그의 삶만이 아니라 그의 시 전반에 걸쳐 지속적인 영향력과 견인력을 행사한 상징적 존재다. 어머니는 그의 존재 근거이자 그의 시를 장악하고 통어하는 뚜렷한 상징적 기제다. 베트남 전장으로 떠나는 젊은이들의 비통한 이별 장면을 형상화한 〈죽음의 둔주곡 ― 三曲〉에서도 뼈아픈 이별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어머니다. 어머니는 혀끝을 안타깝게 차며 눈물짓는 모습도 보이지만 이별을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막내아들을 바다로 밀어 보내는 의연한 모성의 모습도 보이는 것이다. 그 어머니가 도회적 일상의 비애 속에 호출될 때는 다음과 같이 종교적 색채를 띠고 나타난다.
금요일 아침, 8년 만의 서울 거리에서
철들고 처음 울었다
사랑도 어둡고 믿음도 어둡고 활자도 어두운 금요일 아침
이 도시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공복과 아픔뿐이다
철근으로 이어진 도시의 신경 너머
나뭇잎 비비는 소리
냇물의 물고기 튀어오르는 소리까지 모여드는
유랑의 눈물을 나는 다시 불러 모아
이 젊음을 가지고도 잘도 참아 내었구나
어머니가 길러 온 들판 하나를 말려 버렸고
말하지 못하는 나의 말과 꿈꾸지 못하는 나의 꿈과
취하지 않는 나의 술과 나의 배반은 너무 자라서
어머니의 품에 다시 안기지 못한다
열세 켤레째의 구두 뒤축을 갈아 끼우는 금요일 아침
철들어 나는 처음 울었다
―〈금요일 아침〉 전문
8년간의 서울 생활은 그에게 여러 가지 신산한 체험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어둠과 공복과 아픔으로 표상되는 부정적인 것들이다. 젊음의 절정에서 이 시련과 고초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시인적인 유랑의 기질이 있었기 때문인데, 인내력의 한계에 도달해서인지 어느 금요일 아침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때 떠오른 존재가 바로 어머니다. 자신의 시련의 체험은 어머니가 기른 들판을 마르게 했고 좌절의 배반감으로 어머니 품에 다시 안기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어머니에게도 상실감을 안겨준 비통한 심정을 스스로 추스르고 난관을 디디고 다시 일어나 그는 “열세 켤레째의 구두 뒤축을 갈아 끼우는” 행동을 한다. 그는 힘겹게 일어서서 자신의 길을 다시 걸으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머니의 들판을 다시 풍성하게 하고 어머니의 품에 안기려는 분투의 노력이다. 이 시에서 우리는 ‘금요일’이라는 말과 ‘열세 켤레’라는 말에 유의해야 한다. 이것은 기독교의 불길함의 요소다. 시인은 자신의 불행을 기독교적 사유와 결합시키고 있고 그것을 다시 어머니의 기억과 연관시키고 있다. 자신의 불행을 종교적 경건성과 연결 지을 때 그 매개 역할을 해주는 존재가 바로 어머니다. 어머니는 그의 삶과 문학에 아주 중요한 상징적 의미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모성 지향의 지속성과 존재 탐구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느낄 때건, 자신의 삶이 더 높은 차원으로 상승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건, 인간 존재의 근원을 통찰하려 할 때건 어머니는 지속적으로 그의 시에 등장한다. 〈몸은 보이지 않는데―오이도 6〉에서 자신의 통절한 심정을 어머니의 수의 입은 형상으로 나타내고, 〈시간여행 2―시간을 찾아서〉에서 존재 탐구의 일환으로 시간에 대해 사색할 때에도 어머니가 등장한다. 어디 그뿐인가? 시간의 흐름을 좇아 전개되는 인간 삶의 모순과 실상을 탐색하는 야심적인 기획 작품 〈오늘이 그날이다〉 연작이나 〈만나는 법〉 같은 시에도 어머니가 등장하여 삶과 죽음을 매개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머니는 그의 시에 종교적 경건성만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생의 터전 전체를 관장하는 존재로 자리 잡는다. 심지어 오십 가까이 되어 아내의 몸을 더듬는 불안한 순간에도 어머니가 떠오른다.
아내도 오십을 바라본다
이제 아내 몸 구석구석 더듬기에도
소녀경처럼
페이지가 잘 넘어가지 않는다
어떤 때는 파본(破本)처럼 어머니가 나온다
나이 마흔에 과부가 되셨던 어머니가
아내 옆에 파본처럼 따라 눕는다
아내가 나를 길들이는 동안
어머니는 동정녀처럼 얼굴을 붉히고,
오르가슴 없이 내가 태어났던 자국을
아내는 숨긴다
그때마다 나는 배꼽에서 태어났다는
유년 시절 어머니의 말씀을
침 바르며 넘긴 제5장 임어편
갈피에 몰래 꽂아 두었다
―〈파본처럼―소녀경 시편3〉 전문
남자가 《소녀경》을 보는 것은 시들어가는 정력이 보강될 수 있는 길을 찾고자 함이지 성의 본질을 파악하려 함이 아니다. 정력이 넘치고 남아도는 젊은 시절에는 《소녀경》 따위를 볼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소녀경》을 통해 성을 관장하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하지만 실제로는 성에 얽매인 노예가 되고 만다. 정말 성의 주인이 되고 싶으면 《소녀경》 따위를 떨쳐버리고 성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김종철 시인은 아내와 어머니를 대등하게 봄으로써 성에서 해방되어 대자유를 얻었다. 아내를 통해 어머니를 보고 어머니를 통해 아내를 확인한다는 것은 아내와 어머니를 대등하게 사랑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럴 때 아내는 성애의 대상이 아니라 생명 창조의 신비를 간직한 보물이 된다. 아이는 어머니의 배꼽에서 태어난다는 유년 시절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아내의 몸을 어머니와 같은 생명 창조의 공간으로 감싸 안을 때 구질구질한 세속의 성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세계로 해탈하는 순간이 온다. 시인은 어머니의 말씀을 완전히 육화하지는 못하고 책의 갈피에 ‘몰래’ 꽂아 두었다고 했으니 완전한 해방에 이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내의 몸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언덕에는 올라섰으니 그러한 깨달음의 눈길을 갖게 된 것만도 대단한 것이다. 이처럼 대상을 새롭게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가 어머니다. 그래서 모성 지향의 눈길은 존재 탐구의 시선으로 변화한다.
마흔다섯 아침 불현듯 보이는 게 있어 보니
어디 하나 성한 곳 없이 못들이 박혀 있었다
깜짝 놀라 손을 펴 보니
아직도 시퍼런 못 하나 남아 있었다
아, 내 사는 법이 못 박는 일뿐이었다니!
―〈사는 법―못에 관한 명상 6〉 전문
이 시는 ‘인간은 못이다’라는 명제의 선언이다.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라고 노래한 것이 랭보라면 김종철 시인은 ‘못 자국 없는 인간이 어디 있으랴’ 또는 ‘못 아닌 인간이 어디 있으랴’라고 노래한 것이다. 못과 망치는 늘 붙어 다니는 법이니 인간은 못을 치는 망치이기도 하고 망치에 박히는 못이기도 하다. 인간은 고통을 주고받는 존재이며 상처를 서로 확인하는 존재다. 고통과 상처가 있으면 그것을 덜어내거나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가 또한 인간이다. 박힌 못 없이 살 수는 없지만 못을 계속 빼려고 하는 존재가 인간이며, 못이 박혔던 상처를 지우려고 평생 노력하는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의 몸과 마음에서 못을 발견할 수 있는 존재도 인간이다. 그래서 시인은 “나의 망치질 소리는/ 살아 있다는 슬픈 축복입니다”(〈눈물의 방〉)라고 노래했다. 여기서 김종철 시인의 존재 탐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존재의 심연을 찾아서
‘인간은 못이다’라는 명제가 일반론이라면 ‘나는 못이다’라는 명제는 개체론이다. 일반론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개별적 사실부터 검증을 해야 한다. 말하자면 인간 일반이나 타인을 보는 시선이 자기 자신의 문제로 회귀되어야 한다. 자신이 태어난 자리, 지금까지 살아온 내력, 희로애락의 사연들, 현재 처한 정신의 위상 등을 살펴보고 자신의 본모습을 확인할 때 비로소 인간이란 무엇이며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미약한 결론이라도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못에 관한 명상〉 중 과거 회상시편, 그리고 〈초또마을 시편〉 연작은 그런 탐색의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그런데 나를 찾는다는 것,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다는 것도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인간이 무엇이며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가 어려운 것 이상으로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도 대답하기 곤란한 난처한 문제다.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하는 ‘나’가 때로는 낯선 타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다. 다음의 시는 그러한 경험을 형상화한 것이다.
네가 무서워
무작정 도망만 다녔다
늘 한 발짝 앞서 일어나고
꿈속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기 위해
빨리빨리 걸었다
이제 나이 들고 사는 데 지쳐
네가 잡아먹든 말든
천천히 걷고 천천히 숨고 천천히 숨쉬었다
“네가 잡아먹든 말든”
너도 늙었는지 천천히 따라왔고
천천히 생각해 주는 것 같았다
그래 이제는 네가 누군지 보고 싶었다
너·를·보·기·위·해
오늘 처음으로 뒤돌아보았다
한평생 그토록 무서워 달아났던 내가!
오, 내 뒤로 숨는
비겁하게 등을 돌리는 너는?
―〈네가 무서워―못에 관한 명상 15〉 전문
타인에 대한 서술처럼 되어 있는 이 시의 ‘너’는 자기 자신의 분신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상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거울 속의 나’라고 지칭했듯이 시인은 자신이 확인하고자 하지만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자신의 실체를 ‘너’라고 지칭했다. 그런데 네가 왜 무서운가? 분명 자신의 모습이기는 한데 그 정체를 알 수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두려운 대상이 될 것이다. 타인을 모른다고 할 때는 남이니까 모른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내 마음대로 몸뚱이를 움직이는 나 자신을 내가 모른다고 하는 것은 사실은 두려운 일이다. 자기가 무엇인지 모르고 우리가 살아간다면 살아 있는 이 몸뚱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시인은 연작시편인 〈못에 관한 명상 13〉에서 자신의 분신을 예수 대신 풀려난 인간 ‘바라바’로 설정해서 인간사의 측면에서 종교적 성찰을 시도하기도 했고 〈귀향〉에서 불빛 따라 날아와 창문에 자꾸 머리를 박는 “부나방 한 마리”로 자신을 표상하기도 했다. 그만큼 그가 종교적 묵상과 자성의 시간을 많이 보낸 시인임을 알 수 있다. 다음의 시 역시 자신의 본모습을 ‘네놈’이라고 지칭하면서 실체 탐색의 여정이 앞으로도 지속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
기차는 밤새도록 달렸습니다
덜컹대는 침대칸의 흐린 불빛
얇은 요 한 장에 돌아누운
낯선 순례꾼의 잠꼬대
이 밤 우리가 찾는 것은
녹슨 양심을 벼리는 숫돌이고
당신의 발밑에 놓을 기도의 머릿돌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은
단 한 번도 멈추지 못했던
내 욕망의 기차가 마주 달려올 줄이야
저 모순투성이의 철로에
내 전 생애를 낮은 포복으로 기어 오던
오, 그토록 애써 외면했던
바로 네놈까지!
새벽안개 속에
흰 수증기를 내뿜는 기적 소리는
귓전에 울어 쌓이는데
군화 끈을 조여 매고
더블백을 둘러멘 나는 파월 참전병
낯선 전쟁터로 발령받아
세상에서 가장 긴 편지를 어머니에게 쓴 그 밤
덜컹대는 철로 따라 꾹꾹 눌러쓴
문장 몇 줄은 눈물처럼 잘려 나가고
그래그래 이 밤
어머니보다 더 늙은 우리 내외가
삐뚤삐뚤 쓰여진 철로 따라 예까지 왔구나
육십 평생 순례의 끝에서
아들 같은 젊은 나도 데불고
그래그래 당신에게로 함께 갑니다
오, 초원의 빛이여,
루르드의 새벽이여!
―〈밤기차를 타고―초또마을 시편 1〉 전문
부부는 회갑 기념 여행을 하는지 루르도로 가는 유럽 횡단 열차를 타고 있다. 모처럼 호젓한 여행이라면 머나먼 남쪽 여행으로의 즐거움을 누리며 느긋이 흔들거려도 좋으리라. 그런데 여기서 그 두려워하던 ‘너’ 자신의 분신을 또 만나게 된 것이다. 그 환영은 “단 한 번도 멈추지 못했던/ 내 욕망의 기차”이며, “모순투성이의 철로에/ 내 전 생애를 낮은 포복으로 기어 오던”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한 익명의 존재의 급습에 대처할 수 있는 길은 그놈의 손길을 따라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는 것이고, 그놈의 손길에 이끌려 과거의 편력 속에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는 길뿐이다. 그래서 루카치도 소설의 주제는 “나는 내 영혼을 입증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로 집약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시인은 루르도로 가는 부부동반 여행의 밤 열차에서 자신의 분신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분신은 사십 년 전 낯선 전쟁터로 떠나게 된 파월 참전병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이 장면에도 어머니가 전설처럼 다시 등장한다. “세상에서 가장 긴 편지를 어머니에게 쓴 그 밤”을 시인은 떠올리고 있다. 그는 어머니에게 사상 초유의 긴 편지를 쓰고 베트남으로 떠났던 것이다. 그날의 눈물 어린 기억이 떠오를 무렵 저 멀리 지평선에 동이 터 오고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이 다가온다. 나이는 비록 육십이 되었지만 자신의 분신은 여전히 젊은 아들 같은 나이다. 그 아들 같은 젊은 나를 데리고 이제 어머니에게로 가는 존재의 탐색을 시작하는 것이다.
존재의 심연을 탐색하는 작업의 일부가 〈초또마을 시편〉 연작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초원의 빛으로 이어진 철길 저편에 노래로 전화되어야 할 못의 이야기가 산적되어 있다.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한, 못은 인간의 영육 어딘가에 박혀 있기 마련이다. 못의 상징을 통해 존재의 심연을 최초로 탐색한 시인이 김종철이다. 그래서 못은 그의 실존의 근거가 되고 존재의 근원이 되고 어머니가 되고 어머니의 뿌리가 된다. 그렇게 못은 영원으로 가는 길을 흥미롭게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의 심연으로 인도하는 초원의 빛처럼. (*)
—《유심》2012년 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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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숭원 | 문학평론가. 1955년 서울 출생. 1986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평론 등단. 저서로 《시 속으로》 《영랑을 만나다》 《백석을 만나다》 《감성의 파문》 《폐허 속의 축복》 등 다수가 있음. 김달진문학상, 편운문학상, 김환태평론문학상, 현대불교문학상 등 수상. 현재 서울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