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택의「아파트나무」감상 / 김광규
아파트나무
윤성택(1972~ )
인부들이 몰려와 땅을 파고 아파트를 심은 건
고교 입학 무렵이었다 맨 먼저 커다란 파일이 내려가
지하 깊은 곳에 붉은 뿌리를 박았다
모세혈관 같은 철근들이 묶이고
제법 단단한 각질이 덧대어지기도 했다
시끄러운 소음과 분진을 광합성하며
자고 나면 조금씩 높아지는 아파트,
그 위를 크레인이 내려다보며 키를 재곤 했다
건물 층층마다 유리가 끼워지자 가끔씩
저녁 해가 모서리에서 붉게 터졌다
어느 날부터는 커다란 광고가 이파리처럼 매달렸다
분양사무실 칠판은 곧 수확할 열매를 위해
씨방의 규모를 세세하게 적어두었다
이웃 학교 녀석들과 패싸움을 하다가
공사 중인 아파트로 도망쳐 숨은 적이 있었다
미로 같은 곳을 겨우 빠져나와 돌아보니
아직 꽃피지 않은 아파트는 외로워 보였다
너무 큰 꽃은 그늘이 깊다고 하는 것 같았다
주먹의 상처가 가려워질 무렵
아파트 외벽에 밝은 색이 입혀졌다
고층 사다리차가 올라가 해바라기 씨 같은 짐들을
들여놓았고, 그날부터 엘리베이터가
빠르게 펌프질되기 시작했다 그런 밤마다
밝고 노란 열매들이 매달렸다
단지 둘레는 낙과처럼 가로등이 즐비했다
아파트가 해를 가린 즈음부터 나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아파트가 자라지 않는 외곽으로
이삿짐 트럭을 몰고 꽃피러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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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 만에 한국을 다시 방문한 외국인들은 우리나라의 발전상을 보고 입을 모아 경탄한다.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성공적 산림녹화, 고속도로망의 발달과 급격한 도시화다. 수림이 무성해지고, 길이 훤하게 트이고, 고층 아파트 건물들이 온 나라를 뒤덮은 것이다.
나무가 크게 자라려면 몇십 년 걸리지만, 고층 건물이 들어서는 데는 이삼 년이면 족하다. 도처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바람에, 고향에 성묘를 갔다가 길을 잃는 사람도 생겼다. 한적했던 옛 농촌이나 전원풍경을 되찾기는 힘들다. 도시가 끝없이 커지며 서로 이어져 있어, 이제는 ‘아파트가 자라지 않는 외곽으로’ 떠날 수도 없게 된 것 같다.
김광규(시인·한양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