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비평/에세이

[에세이 사물 사전] 클립 - 김수우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4.10.22|조회수316 목록 댓글 0

 

[에세이 사물 사전] 클립 - 김수우

 

[에세이 사물 사전] 클립 ⓒ이현경



마음을 클립하다

가방 안 틈새에서 굴러다니는 클립을 종종 발견한다. 원고를 갖고 다니는 습관 때문일 게다. 잡동사니가 든 통마다 어김없이 오래된 클립 한두 개씩 먼지를 물고 있다. 서랍 속 작은 유리그릇에도 클립이 한 옹큼이다. 그다지 요긴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사용하곤 이내 던져놓았다가 다시 사용하곤 또 그만이다. 도구와 용품들의 세계에서 클립은 거의 등급이 없다. 자연물도 공예품도 아니다. 새로울 것도, 특별할 것도, 애틋할 것도 없다. 어떤 은유나 기억을 담을 만한 틀도 되지 못한다. 은폐되어 있다가, 잠시 쓰이고 나면 이내 잊히거나 버려진다. 사소해도 너무 사소하다. 하지만 잠깐잠깐 스치던 기특한 느낌은 요즘 들어 갸륵한 느낌으로 바뀌었다.

 

매끈한 구부러짐. 이 반짝이는 금속은 무언가를 엮어내는 것이 역할이다. 묶는 도구들 중에서 가장 선량하다. 폭력적이지도 않고 침략성도 없다. 함부로 종이를 찌르거나 구멍 내지도, 아프게도 하지 않는다. 가볍고 깨끗하고 부드럽다. 여리면서도 단호한 이 서푼짜리 모든 의미를 단정하게 한다. 나는 이것을 ‘여밈의 철학’이라고 부르고 싶다. 여민다는 말에는 소박하고 지극한 어떤 에너지가 있다. 여밈. 이것은 우리가 오래전에 잃어버린 개념 또는 행위가 아닐까. 클립을 사용할 때마다 맑고 단아한 손끝을 떠올리게 된다.

 

이 작은 금속도 자기만의 언어를 가진, 은폐된 세계-내-존재인 건 분명하다. ‘~을 하기 위한’ 도구성으로 존재하는 이 존재자에게는 사건이 없다. 클립을 향해 무슨 사건을 구성하겠는가. 이 눈앞의 사물은 거의 주목도 끌지 못하고 어떤 은유도 없다. 웬만한 사물들은 삶 속에서 다양한 상징이 부여되기도 하지만 클립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 사건이 없다. 클립의 이야기는 사건이 없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도구란 그 도구가 쓰일 수 있는 용도와 재료만을 지시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도구적 존재자는 현존재라는,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지시도 포함한다는 것이다. 분명히 클립은 나를 지시한다. 내가 글 쓰는 게 직업인 작가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사건이 없이도 지시한다. 하여 클립은 마침내 내게 궁극의 질문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클립의 생명성일까. 소모품에 불과한 클립의 은폐는 도구의 존재양식뿐만 아니라 나의 존재양식도 선명하게 한다.

 

보잘것없는 이 작은 금속의 역할은 분산을 막는 것이다. 사무실의 목록 속에서도 쉽게 소외되는 클립은 결집하는 능력을 자기 식으로 감당해낸다. 때문일까. 클립은 나에게 안정을 선물한다. 손을 빠져나갈 듯한 종잇장 몇 장과 그 불안을 클립은 가지런히 모아주고 여며준다. 그 순간 마음이 놓인다. 단아한 손끝이 맺은 고름처럼 모든 차림이 소중해진다. 고대 식물학자가 된 듯 뿌듯한 느낌을 주는 희디흰 A4 뭉치들도 결국 여미는 마음이 필요하다. 글쓰기라는 정신의 과정이 그러하고, 원고가 된 종잇장의 존재양태가 그러하다. 클립은 원고를 잘 여며준다. 그것이 점점 클립이 갸륵해지는 이유라고 할까.

 

클립은 무모한 반항도 허세도 영웅심도 없다. 그저 평범하면서도 유용하고 충실하고 신중하다. 작은 역할에 신실한, 그 반짝이는 혹은 오래 잊혀 퇴색된 클립은 살아가야 할 바탕으로 다가온다. 쓸데없이 자존심이 상하거나, 괜한 피해의식으로 고통스러울 때 클립은 소슬한 목소리가 된다. 너무 사소하고 간단히 잊히지만 언제든지, 무언가를 묶어내는 역할에는 한결같다. 그러면서 도구적 존재자의 성실함이 나에게 매번 확인시켜주는 것은 존재의 외로움과 외로움의 빛나는 단면이다.

 

가지런히 모아준다는 것, 여며준다는 것은 새로운 미학이다. 산만한 것들을 제대로 존재하게 만들어주는 작은 사물의 노동, 한마디로 그것은 단정하다. 한 번도 강조하지 않았고, 한 번도 그리워하지 않았고, 한 번도 절실하지 않았지만 종잇장을 묶어주는 클립들을 볼 때, 나를 헤아리게 된다. 마음의 다발, 생각의 다발이 여며지는 것이다.

 

흐트러진 마음이나 사람의 관계에도 반짝이는 작은 클립이 있었으면 싶을 때가 많다. 생각이 복잡할 때도 마음의 클립을 생각한다. 내가 클립을 찾아낸 게 아니었다. 오늘도 클립은 뜻밖의 틈바구니에서 나를 찾아낸다.

 


  김수우(시인)

 

김수우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5년 <시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길의 길》, 《당신의 옹이에 옷을 건다》, 《붉은 사하라》, 《젯밥과 화분》, 산문집 《씨앗을 지키는 새》, 《백년어》, 《유쾌한 달팽이》, 사진에세이집 《하늘이 보이는 쪽창》, 《지붕 밑 푸른 바다》, 《당신은 나의 기적입니다》 등이 있다. 부산작가상, 아르코문학상을 수상했다. 2002년, 2005년,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을 수혜했고, 2013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국제교류 해외창작거점 예술가파견사업 문학부문 예술가로 선정되었다.

 

 

                _ 한겨레 문학웹진 <한판>  2014.10.08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