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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비에 가로 왈 / 강인한 -수필 같은 산문시, 콩트집 같은 시집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4.11.16|조회수491 목록 댓글 0

  녹비에 가로 왈

    -수필 같은 산문시, 콩트집 같은 시집

  

   강인한

 

 

 

   신축성이 좋은 사슴 가죽은 무척 얇고 부드럽습니다. 그 사슴 가죽을 한자로 쓰면 ‘사슴 록(鹿), 가죽 피(皮)’인데 한글 독음은 ‘녹비’라고 쓰며 그 실제 발음은 ‘녹삐’입니다. 사슴 가죽[鹿皮 녹비]에 가로 왈(曰) 자를 써서 위아래에서 잡아당기면 날 일(日) 자가 되고, 좌우에서 잡아당기면 가로 왈(曰)자가 됩니다. 그러니까 녹비에 글씨를 쓴 이가 날 일(日) 자를 썼는데 보기에 따라 가로 왈(曰) 자가 되기도 하고, 가로 왈(曰) 자를 썼는데 어떤 이는 날 일(日) 자로 읽을 수도 있겠습니다.

 

   요즘 퓨전 음식이라는 것을 먹어볼 때가 가끔 있습니다. 글쎄 딱히 한식이랄 수도 없고 양식이랄 수도 없는 음식…. 그냥 산뜻한 맛에 맛있게 먹고 나면 그뿐이지요. 하지만 가게의 간판에 그 식당이 일식집인지, 중식집인지, 한식집인지는 구별돼 있습니다.

   글도 요즘 그 비슷한 경향으로 가는 게 유행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 경계가 애매한 글. 산문인지 운문인지 ‘녹비[鹿皮]에 가로 왈(曰)자’ 같은 글들. 다음 글이 꼭 그런 예 같습니다.

 

 

   만약 너의 엄마가 어깨에는 링거 줄이, 코에는 음식물을 밀어 넣는 플라스틱 줄이, 하체에는 소변 줄이 매달려 있다면, 소리 없이 액체가 흘러내리면서 내부가 외부로 흘러 해체가 진행 중이라면, 무슨 진지한 사건이나 물건을 대하듯 간호사와 의사가 근엄하게 오가고, 소독복으로 갈아입은 네가 침대 곁으로 가서 망각으로 가는 길을 좀 늦춰보려고, 이렇게 말을 하게 된다면. "엄마 내가 왔어. 나를 알아볼 수 있어? 눈까풀을 깜박여 봐. 고개를 끄덕여 봐" 반응 없는 대상을 향하여 옛날 얘기를 들려주듯 평범한 사람이 평범한 마을에 살았어요, 평범한 가족들과 평범하게 살던 평범한 사람의 육체가 여기 누워 있어요, 라는 식으로 너는 너의 엄마를 오브제로 볼 수 있겠니, 객관화 할 수 있느냔 말이야.

 

   지난주에 막 떨어지려고 하던 잎들은 다 떨어지고, 엉켜서 엎어져 있고, 바람에 날리던 것들이 흙 속으로 기어들어가 각각의 원소로 바뀌려 하고, 사실이 비사실로 변해가던 잠깐 사이, 눈으로는 창밖 나무들의 나라를 헤매고, 이것은 상상한 세계인지도 몰라, 상상이 눈앞에 비현실처럼 펼쳐지는 거야, 생각을 잠깐 펼쳤다 가는 것처럼 이 계절은 텅 비었다가 다시 가득 채울 거야.

 

   누워 있는 식물인간들, 우리 그럴 가능성이 있지. 그런데 그게 바로 너 자신이라면? 네 핏줄이라면? 엄마가 살던 집을 팔아 없애야 하고, 살림살이, 옷가지, 고물상이 와서 무게로 달아가게 내버려두고, 버리는데 돈이 더 드네. 한심해서 너도 몇 가지 주워들겠지. 식물 된 사람이 입었던 코트, 스카프, 자줏빛에 초록 안감을 댄 두루마기, 식기 몇 개, 다들 집은 좁은데 김치 냉장고는 누구네 집으로 치워야 하나, 아픈 몸으로 된장은 왜 담가서 항아리마다 채워놓고, 오래된 맷돌, 이건 장식용 골동품인데 아깝지만, 쓰다만 양념들, 참기름, 들기름은 오래 돼서 버리고, 코트와 두루마기는 수선하면 입게 될까.

 

   그것이 누구의 이야기든, 센티멘털하게 흘러가겠지. 센티멘털 저니, 이 길 밖으로 벗어날 수 있을까, 벌떡 일어나 나간다 하더라도, 갈 데도 없고, 갈 길도 모르겠고, 그런데 내가 어디 있는지는 몰라도 내 삶은 빤히 알고 있겠지, 지금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빤히 바라보겠지, 이 길 밖에서 올빼미 눈 같은 것을 번득이면서.

 

 

   노쇠하여 혈육이 병들어 죽어감을 바라보는 일이란 슬프고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 글이 그렇습니다. 만약 너의 엄마가, 라고 가정법을 써서 말하고는 있어도 이 글에서 필자는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에 대하여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은 조금씩 자리를 바꿔 죽은 사람의 소유물에 대한 처리 문제를 걱정하기도 하고, 결국 감상적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글쓴이는 사유의 굴곡을 천천히 틀어나가며 글을 쓰고 있는데 글쎄, 이런 글을 어느 장르에 넣어야 할까요. ‘생명이 차츰차츰 죽어가는 것’을 ‘소리 없이 액체가 흘러내리면서 내부가 외부로 흘러 해체가 진행 중’이라고 표현한다든가 ‘죽음을 늦춰보려고’ 같은 대목에서 약간 멋을 부려 ‘망각으로 가는 길을 좀 늦춰보려고’라고 썼대서 시(산문시)로 볼까요, 아니면 비교적 짧은 길이의 수필(산문)로 봐야 할까요. 이런 경우 단지 글쓴이가 소설가라면 ‘산문’으로 시인이라면 ‘시’로 처넣어야 할 것인지.

   아무튼 아슬아슬합니다. 분명 이건 경계에 서 있는 글인데 그걸 시라고 우기면 산문시라고 볼 수도 있을 테고, 산문이라고 우기면 시적인 산문이라고 볼 수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이 글은 올해 '미당문학상' 후보작으로 거론된 최정레(59) 시인의 「이 길 밖에서」입니다.   2007년 제52회 현대문학상 수상작 「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이후부터 점점 더 산문 쪽으로 들어가는 조짐이 있었습니다만….  시인은 지난해 어머니의 별세로 인한 충격 때문에 한동안 시를 쓸 수 없었다고 하는 인터뷰 기사(중앙일보 2014.08.29)를 읽었는데 저런 글을 쓰느니 차라리  한  1년 동안 시를 쉬며 시 정신을 추스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자기가 시적 상상력을 부풀려 쓴 산문을 산문시라고 착각하는 건 그 나이가 많고 적음과는 상관없나 봅니다.   올해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김현(34)의 『글로리홀』은 엄밀히 말하면 시집으로 볼 게 아니라 SF콩트집으로 분류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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