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비평/에세이

예이츠의 「레다와 백조」감상과 평설/ 김정환, 강인한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4.12.27|조회수4,640 목록 댓글 0

예이츠의 「레다와 백조」감상과 평설/ 김정환, 강인한

 

 

레다와 백조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1865~1939)

 

 

갑작스러운 일격 : 거대한 날개가 여전히 쳐대는

그 아래 비틀거리는 처녀, 그녀 넓적다리, 포옹한 것은

시커먼 물갈퀴, 그녀 목덜미, 사로잡은 것은 그의 부리,

그가 붙잡는다 그녀의 속수무책 젖가슴을 자기 가슴에.

어떻게 그 겁에 질린 막연한 손가락들이 밀쳐낼 수 있겠는가

그 깃털 난 영광을 그녀의 풀어지는 넓적다리에서?

그리고 어떻게 육체가, 그 하얀 돌진에 놓여,

느끼지 않겠는가 그 이상한 심장, 누워 박동하는 그것을?

떨림, 음부 속 그것이 낳는다 거기에

부서진 벽을, 불타는 지붕과 탑과

죽은 아가멤논을.

그렇게 사로 잡혀,

그렇게 공중의 난폭한 피에 지배당하여,

그녀가 입었는가 그의 지식을 그의 권능으로써

무심한 부리가 그녀를 떨어지게 할 수 있기 전에?

 

 

   언어만으로 다소 과장되게 보자면 셰익스피어 영어의 해체-재구성 작업이지만 예이츠 시전집은 이제껏 쓰인 가장 거대하고 위대한 연애시 한 편이기도 하다. 육체가 이상의 천국이자 현실의 지옥이다. 무덤은 육체의 휴식처. 시인이 평생 연모했으나 이혼녀일 때 딱 한 번 살을 섞은 여자 때문이다. 성욕 자체의 아름다움이 가능하다니…. 그게 시인의 현대성 가운데 하나다.

 

  _김정환 (시인)

 

---------------------------------------------------------------------------------------------------------

 

극적인 정점에서 시작하는 시 「레다와 백조」

 

Leda and the Swan

     ―W. B. Yeats

 

 

A sudden blow: the great wings beating still                느닷없는 일격, 비틀거리는 소녀 위에

Above the staggering girl, her thighs caressed           거대한 날개가 아직도 펄럭인다, 검은 물갈퀴는

By his dark webs, her nape caught in his bill,              그녀의 허벅지를 애무하고, 부리는 목덜미를 집는다.

He holds her helpless breast upon his breast.            그녀의 여린 가슴을 백조는 제 가슴에 껴안는다.

    

How can those terrified vague fingers push                 저 겁에 질린 힘없는 손가락이 어찌 밀어낼 수 있으리,

The feathered glory from her loosening thighs?           맥 풀린 허벅지에서, 깃털에 싸인 영광을.

How can anybody, laid in that white rush,                     백색의 급습, 그 누군들 눕혀진 그곳에서

But feel the strange heart beating where it lies?           이상한 심장의 박동을 느끼지 않을 수 있으리.

 

A shudder in the loins, engenders there                       떨리는 허리는 거기

The broken wall, the burning roof and tower                 무너진 성벽과 불타는 지붕과 망루

And Agamemnon dead.                                                 죽은 아가멤논을 잉태한다.

Being so caught up,                                                      그렇게 꽉 붙잡힌 채

So mastered by the brute blood of the air,                    그렇게 짐승 같은 하늘의 피에 정복당한 소녀는

Did she put on his knowledge with his power               무심한 부리가 그녀를 떨구기 전에

Before the indifferent beak could let her drop?             그의 권능과 예지를 고스란히 전해 받게 되었을까.

 

 

 

   예이츠(1865∼1939)의 이 시는 1928년에 발표한 The Tower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의 배경이 되어 있는 그리스·로마 신화를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신화에 의하면 아에톨리아의 왕녀인 레다가 에우로타스강에서 목욕하고 있는 것을 본 제우스신이 백조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하늘에서 날아와 그녀를 겁탈한다. 질투가 심한 아내 헤라의 눈을 피해 제우스는 황소로, 때로는 뻐꾸기로 변신하여 외도를 하곤 하였다.

   백조에게 겁탈 당한 레다는 두 개의 알을 낳는다. 하나의 알에서는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아름다운 헬렌이 태어나고, 다른 한 알에서는 트로이 전쟁 때 그리스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아내로서, 십 년 동안의 전쟁에서 돌아온 남편을 살해한 클리템네스트라가 각각 태어난 것이다.

   예이츠는 인류문명이 2천년을 주기로 하여 순환하는데, 그리스문명 2천년의 시점을 레다와 백조의 교섭(交涉)의 순간으로 본다. 그 신과 인간의 교섭의 순간을 예수의 수태고지(천사 가브리엘이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의 수태를 알린 일)와 맞먹는 중대한 역사적 순간으로 본 것이다. 예이츠가 이 극적인 순간을 포착하여 시화한 것이 '레다와 백조'라는 시이다.

   제우스신이 거대한 백조로 변신하여 하늘에서 쏜살같이 내려와 강에서 목욕하고 있는 레다를 덮치는 이 장면. 난공불락의 트로이 성벽이 끝내는 무너지고 수많은 병사들과 영웅이 전쟁터에서 죽어간 바로 그 전쟁의 최초의 발단. 하늘과 땅, 신과 인간, 백조와 소녀, 짐승스런 욕망과 무력한 의지, 유장한 흐름의 강과 무상한 인간의 역사… 그 완벽한 대비가 이 시에 각을 세우며 드러나 있지 않은가.

 

   '느닷없는 일격(A sudden blow)', 비수처럼 던져진 시의 첫 부분은 하나의 극적인 정점이다. 첫 연은 레다가 백조에게 피습 당한 상황의 묘사이지만 성적인 표현이 강렬하다. 아직도 펄럭이는 거대한 날개와 함께 허벅지를 애무하고 여린 가슴을 껴안는 백조의 행동이 그것을 말해준다.

   둘째 연은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하늘의 운명에 대한 탄식. 두 개의 의문문으로 구성된 이 부분은 불가항력에 직면한 인간의 무력함을 화자가 해석해 내고 있다. 그 모든 것이 '백색의 급습(white rush)'이라고 표현된 레다의 의식을 전제하면서.

   전율하는 여인의 허리에서 잉태되는 것들— 길고도 처참한 십 년 동안의 트로이 전쟁, 영웅의 죽음 등을 이야기하는 이 셋째 연은 극적인 대비가 최고조에 이른다. '떨리는 허리' 란 어쩌면 생명의 극치감일 수도 있는 관능적 표현인데 그로 인하여 태어나게 된 건 역설적으로 아가멤논으로 대표되는 죽음이다. 또한 '짐승 같은 하늘의 피에 정복당한 소녀'라는 구절에서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 본다. 짐승 같은 정복자와 가련한 소녀, 신과 인간, 하늘이라는 천상계와 땅이라는 인간계, 무심한 정복자와 고통받는 피정복자. 어쩌면 아일랜드 출신의 시인 예이츠는 여기에 정치적 시련에 시달려온 아일랜드의 역사와 운명을 암시하여 넣었는지도 모르겠다.

 

   '레다와 백조'라는 같은 제명의 그림을 본다. 신화적인 주제를 격렬하고 몽환적인 이미지로 그려낸 예이츠의 시와 달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제자 세자레 다 세스토가 그린 '레다와 백조'는 지극히 평화롭고 부드럽다. 많이 보아온 다빈치의 화풍 그대로이다.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에서처럼 나체의 레다가 서 있다. 백조의 목을 휘감으며 레다는 알 수 없는 야릇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데, 그 발치에는 막 알에서 깨어난 아기들이 기어다니고 있다. 이 그림은 레다가 거대한 백조에게 유린당하는 게 아니라 마치 백조와 나란히 서서 정답게 놀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레다와 백조'는 내 생각으론 다빈치나 세스토의 그림보다도 예이츠의 시가 단연 압권이다.

 

  _강인한 (시인)

 

               —《현대시》2006년 10월호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