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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세이

도스토예프스키를 위한 헌시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02.10.25|조회수946 목록 댓글 0
도스토예프스키를 위한 헌시(獻詩)




일생에 단 한 권의 책을 읽어야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권할 것이다.
우연히 러시아 문학을 최초로 대한 것은 내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교문 앞에서 덤핑 책을 늘어놓고 파는 데서 맨 처음 만난 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나는 그 조잡한 초역본(抄譯本)을 사서 읽었다. 주인공 라스코리니코프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졌었는지는 기억이 희미하다. 아마도 전반부보다 후반에 이르면서 딱딱한 주인공의 심리 추적에 넌덜머리를 내지 않았던가 싶다.
솔제니쯔인의 「이반 제니쏘비치의 하루」를 읽은 것은 내 나이 만 열 아홉 때였다. 그 책은 당시 '사상계사 출판부'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단숨에 읽혔다. 그리 길지 않은 소설이라는 점도 있었으나 무엇보다 작가가 그려낸 수용소 생활에 대한 리얼한 표현에 나는 압도되었다. 견디기 어려운 군사정권 시절이었을지라도 그 소설을 읽고 나니 내가 먹는 초라한 세 끼의 밥이 갑자기 맛있었다. 밥맛을 돋궈주는 소설이라면 작가는 어이없어 하겠지만, 그게 그 어린 시절의 소박한 느낌이었음을 고백한다. '스탈린에 대한 부주의한 언동'이 빌미가 되어 작가는 8년간의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복역하였으며 그때의 경험이 이 소설 속에 용해되어 있는 것이었다.

슈호프는 지극히 만족한 기분으로 잠을 청했다. 오늘 하루 동안 그에게는 좋은 일이 많이 있었다. 정말 재수 좋은 하루였다. 영창에도 들어가지 않았고, '사회주의적 촌락'으로 추방되지도 않았다. 점심때는 죽 그릇 수를 속여 곱빼기로 얻어먹었다. 반장이 가서 작업량 사정도 적당히 해 넘긴 모양이다. 오후에는 신나게 블록을 쌓아 올렸다. 줄칼 조각도 무사히 가지고 들어왔다. 저녁에는 쩨자리 대신 순번을 기다려주고 많은 벌이를 했다. 그리고 담배도 사 왔다. 무슨 병에 걸린 줄만 알았던 몸도 아주 거뜬하게 풀렸다.
우울하고 불쾌한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거의 행복하기까지 한 하루였다.

이렇게 슈호프는 자기의 형기가 시작되는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만 십 년을― 3천 6백 53일을 하루같이 보낸 것이다. 사흘이 더 가산된 것은 그 사이에 윤년이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이 마지막을 읽으며 나는 울었다. 만 십 년에 윤년으로 사흘이 가산된 형기를 하루같이 살았다는 대목이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전율처럼 심금을 울린 때문이었다.
다시 내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나게 된 건 스물 일곱 살 때다. '정음사'에서 한 달에 한 권씩 그 전집을 발간하였다. 4·6배판의 판형으로 본문은 8포인트 활자를 사용하였고 2단 세로짜기의 책들이었다. 나는 그 전집을 큰맘먹고 구입하기로 작정하였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이 대작을 나는 거의 한 달 이상을 소요하며 읽었다. 서두의 3백 페이지쯤 읽을 때까지 솔직히 고백하건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그 무렵 중국의 와룡생이 지은 「금검지」류의 무협지가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그에 비하면 이건 참으로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게 고비였을까. 나는 정신없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어갔다.

"어떻게 저따위 인간이 살아 있을까!" 이제는 거의 분노의 절정에 달한 드미뜨리가 맹수의 울부짖음 같은 소리를 질렀다. 양쪽 어깨를 잔뜩 치켜세우고 있는 품이, 곱사등이가 아닌가 생각될 지경이었다. "아니, 저 사람에게 더 이상 대지를 더럽히는 것 같은 언동을 허용해도 좋을까요, 여러분?" 그는 한 손으로 장로를 가리키며 일동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저것 보십시오, 들으셨습니까? 수사님. 제 아비를 죽이려 드는 저놈의 말을?" 하며 표도르는 이번에는 이오씨프 신부에게 대들었다. (……)
그러나 추태가 절정에 달한 이 장면은 전혀 뜻하지 않은 일로 하여 중단되었다. 조씨마 장로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스승의 신상과 일동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거의 얼빠진 사람처럼 되어 있던 알료샤는, 그래도 엉겁결에나마 장로의 손을 잡아 드릴 수 있었다. 장로는 드미뜨리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에게로 다가가자 느닷없이 몸을 던져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알료샤는, 장로가 기운이 없어 쓰러진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장로는 무릎을 꿇더니 드미뜨리의 발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그것은, 방바닥에 이마가 닿을 정도로 공손하고도 어김없는, 의식적인 절이었다. 알료샤는 어찌나 놀랐던지 장로가 몸을 일으키려 했을 때도 미처 그를 부축해 드리지 못했다. 가냘픈 미소가 보일 듯 말 듯 장로의 입가에 떠올라 있었다.
"용서하시오! 여러분, 용서하시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사방의 손님들을 향해 인사를 했다. 드미뜨리는 얼마 동안 무엇에 호되게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내 발에다 절을 하다니, 대체 어찌된 영문일까? 그러나, 별안간 그는 "아아!"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그냥 밖으로 달려나가 버렸다.

그루센까라는 젊은 여인을 빼앗아 오기 위해서는 아들에게 결투라도 청하겠다는 호색한 아버지 표도르, 그에 맞서는 방종하며 열정적인 장남 드미뜨리 사이에 벌어지는 이 살벌한 언쟁이 벌어지는 건 소설의 서두에 해당한다. 인색과 육욕과 시기심의 소유자인 아버지 표도르에게는 의지력이 없고 방종한 장남 드미뜨리, 지적이지만 에고이스트인 차남 이반, 종교적이며 무구(無垢)한 막내아들 알료샤가 있다. 그리고 표도르에게는 노예적 근성의 음흉한 스메르자코프라는 사생아가 하나 더 있다. 어느 날 밤 그루센까를 은근히 기다리던 표도르는 자기 서재에서 둔기에 머리를 맞고 살해된다. 여러 가지 결정적인 증거로 장남 드미뜨리가 친부 살해죄로 체포된다. 재판이 열리고 결국 그는 유죄가 확정되고 만다.
마지막 종결부로 나아가는 부분에 이르러 작가는 치밀한 범죄 심리, 성격 분석, 논리적 추리 등의 기법을 자연스럽게 전개하는데 어느 추리소설도 이에 따를 수 없으리만큼 차원 높은 리얼리즘을 보여준다. 이 소설을 다 읽고 나서 한참 동안 나는 망연자실한 심정에 빠져 있다가 '인간의 사랑, 인간의 사상이 심해보다 깊고 대륙보다 넓을 수 있다.'는 생각에 놀라울 뿐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천형(天刑)의 간질병 환자인 동시에 가난한 도박꾼으로 일생을 살았다. 노름빚을 갚기 위해서도 소설을 써야 했던 그는 프랑스의 2월 혁명 이후 러시아의 정치적 결사에 가담하여 그 일로 체포된다. 스물 여덟 살 때였다. 한겨울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형 집행 직전에 극적으로 황제의 특사를 받아 시베리아 옴스크 요새로 유배된다. 45세에 「죄와 벌」, 47세에 「백치」, 52세에 「惡靈」을 출판하였으며 4년에 걸쳐 쓴 걸작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59세에 완결하고 이듬해에 그는 세상을 떠났다.
우리 나라에는 이 대작이 완역되기 전에 동명의 영화가 먼저 소개되었었다. 율 브린너와 마리아 셸이 열연을 보여준 영화라고 기억된다. 그 영화를 그 무렵에는 고등학생 신분으로서는 볼 수 없었던 엄격한 교칙 때문에 못 보았던 점이 안타깝다. 하지만 영화로 미리 못 보았던 사실이 내가 이 소설을 감명 깊게 읽을 수 있었던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 같다.


초겨울 寺院墓地에 내리는 눈
― 도스토예프스키에게

차디찬 영하의 햇빛이 광장 저편에서
교회 용마루를 금빛으로 물들일 때
그대는 스물 여덟의 젊은 이상주의자로
처형대에 묶여 있었다, 사형 선고가 내리고
늘어선 병사들이 천천히 총을 들어
그대 하얀 속옷을 붉은 피로 적시기 직전
아아, 나팔 소리는 울리고
황제의 특사령이 그 자리에서 낭독되었다
기억하는가 표도르
꿈으로만 흐르는 강물 소리 그리운 초원을
시베리아, 옴스크 요새 죽음의 집
벽돌을 져 나르고 돌아온 저녁
두 발에 무거운 쇠사슬을 절렁거리며
좁은 욕실에서 떼 뭉쳐 목욕하는 아수라 속에서도
표도르, 그대의 영혼을 악마도 뺏을 수가 없었다
빈민 구제 병원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악질의 병과 도박에 하염없이 시달리면서
뼈를 깎아 세운 …… 인간의 대륙
저 뜨겁고도 광막한 대륙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대가 죽도록 사랑한 므이쉬낀과 알료샤
니콜라이 스타브로긴의 슬픈 이름이
초겨울 사원 묘지에 내린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그대를 부르며 페테르스부르크에 눈이 내린다.

( 2001년 8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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