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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세이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해설 / 권순진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5.07.01|조회수2,793 목록 댓글 0

김수영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해설 / 권순진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 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앞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 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이것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월간 <문학춘추> 19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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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기 어려운 세월들이 부닥쳐올 때마다 나는 피곤과 권태에 지쳐서 헙수룩한 술집이나 기웃거렸다. 거기서 나눈 우정이며 현대의 정서며 그런 것들이 뒷날 내 노트에 담겨져 시가 되었다고 한다면 나의 시는 너무나 불우한 메타포의 단편들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정말 그리운 건 평화이고 온 세계의 하늘과 항구마다 평화의 나팔소리가 빛나올 날을 가슴 졸이며 기다리는 우리의 오늘과 내일을 위하여 시는 과연 얼마만한 믿음과 힘을 돋우어줄 것인가." 이상은 1957년작 <폭포>의 시작메모다. 

   반공포로 출신의 자유주의자 김수영의 간절한 평화 염원 메시지다. 일제 말기 동생이 학병으로 징집되는 속에서도 만주에서 연극을 했던 사람이 김수영이고, 거제 포로수용소에서 미군 군의관의 통역을 하며 거즈를 개키던 사람이 김수영이었고,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기다리던 여인에게 바람을 맞자 술을 진탕 마시고 완전 뻗었던 사람이 김수영이었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근처 설렁탕집에서 먹은 맛대가리 없는 설렁탕에 짜증이나 내는 나 자신이 문득 싫어진다. 김수영의 뿌리 깊은 옹졸함의 내력이다.

    현실에 분개하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한 지식인의 비애, 자조, 궁색함이 낭자하다. 자기반성이나 성찰의 태도인 듯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님을 안다. 누구의 생인들 멈칫멈칫 우물쭈물하다가,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다가 결국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이것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탄식으로 마무리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느냐. 50년 전 김수영이 그랬던 것과 다르지 않게, 불운한 사람은 언제나 그렇게 시대를 우울하게 사는 것이다. 불우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에 대한 한없는 힐난에 잠겨들지 않고, 그 뿌리를 짚어가며 사회적, 현실적인 문제로 한 걸음씩 나아가는 비판적 지성의 힘센 발길을 그의 시에서 느낀다. 언론의 자유에 대하여, 월남파병에 대하여, 한국전쟁의 수모에 대하여, 거슬러 올라가서 왕궁의 음탕에 대하여. 현실의 벽에 부딪쳐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던 여건과 그것을 넘어서 완전한 사회를 구현하려는 시인의 갈등을 이 시는 잘 드러내고 있다.

   시대는 변했다지만 권력자들의 방자함과 몰염치와 부도덕을, 그로인한 사회모순과 부조리를, 복장 터지는 일들의 연속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여전히 입술로만 씹고 있다. 어느 날 떠들썩한 문인들의 술자리에서 그가 뱉어낸 일갈이 가슴을 후빈다. "이 썩어빠진 정부며 늙은 독재자를 빼놓고, 불쌍하고 힘없는 문인들 험담이나 해서 쓰겠어? 당신네들 시가 예술지상주의 냄새가 나는 건 그 지나친 조심조심 때문이오!"  김수영과 마찬가지로 '평화의 나팔소리'를 염원하건만 우리의 삶과 시를 쓰는 행위는 얼마나 평화와 멀리 있고 또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권순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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