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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세이

권기호의「개싸움」해설 / 권순진

작성자강인한|작성시간15.08.28|조회수355 목록 댓글 0

권기호의「개싸움」해설 / 권순진

 

 

개싸움

 

  권기호

 

 

 

투전꾼의 개싸움을 본 일이 있다

한 쪽이 비명 질러 꼬리 감으면

승부가 끝나는 내기였다

도사견은 도사견끼리 상대 시키지만

서로 다른 종들끼리 싸움 붙이기도 한다

급소 찾아 사력 다해 눈도 찢어지기도 하는데

절대로 상대의 생식 급소는 물지 않는다

고통 속 그것이 코앞에 놓여 있어도

건들이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개들이 지닌 어떤 규범 같은 것을 보고

심한 혼란에 사로 잡혔다

 

이건 개싸움이 아니다

개싸움은 개싸움다워야 한다(개판 되어야 한다)

개싸움에 무슨 룰이 있고 생명 존엄의 틀이 있단 말인가

나는 느닷없는 배신감에 얼굴이 붉어왔다

 

 

         —시집『원로문인작품집』(대구문인협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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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희한한 싸움의 룰이 동물생태학적으로 검증된 보편적 진실인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타의에 의해 서로 으르렁대며 싸움은 하지만 치명적인 상황까지는 가지 않겠다는 상호 묵시적 담합이 존재한다는 뜻 아닌가. 개싸움은 당연히 개판이 되어야 마땅하거늘 이 무슨 당치않은 개뼈다귀 같은 수작인가. ‘절대로 상대의 생식 급소는 물지 않는’다니. 마지막 보루, 최종의 밑천은 서로 존중해주어 거들내지 않겠다는 신사도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를 목격한 시인은 ‘심한 혼란에 사로잡히고’ ‘배신감에 얼굴이 붉어’졌다고 하지만 어쩌면 이런 ‘개판’보다 못한 인간사도 버젓이 존재하기에 적이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겠다. 인간의 무자비한 싸움은 때로 상상을 초월한다. 수단방법 안 가리고 갈 데까지 간다. 목숨이 간당간당한 사람을 짓밟는가하면 느닷없이 뒤통수를 치기도 한다. 탐욕을 채우기 위해 룰이나 규범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생식급소 아니라 그보다 더한 거라도 이기기 위해서는 물고 늘어지고 감춰진 아킬레스근도 용케 찾아 물어뜯고야 만다.

   요즘은 상대를 반드시 죽이는 기술이란 뜻의 '필살기'란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아무데서나 쓴다. 이 필살기를 휘두르는데 가장 능숙한 사람들이 정치인일 것이다. 정치인뿐만 아니라 높은 곳에서 많이 가지고 누리고 지배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렇다. 그들의 명예욕이나 권력 욕구, 체면은 보통 사람들의 그것보다 훨씬 강도가 쎄다. 그 과정에서 발현되는 위선과 기만, 그리고 탐욕은 그들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다. 상류층 혹은 지도층이라고 부르는 우리 사회 지배계급의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문화양태로 자리잡고 있다.

   그들의 필살기에 나가떨어진 많은 이들의 생식급소에는 패인 이빨 자국이 선명하다. 고래가 싸우면 등이 터지는 건 새우뿐이다. 쎈 놈이 주먹을 휘두르면 약한 놈은 얻어터질 밖에 없다. 심하면 불알이 까이고 아작이 난다. 이건 좀 '서로 다른 종들끼리'의 싸움이지만, 극한 대립처럼 보였던 남북 긴장 관계가 '개싸움'으로 끝나 힘없는 민초들로서는 천만 다행이다. 물론 예견된 수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잘 했다, 잘 됐어' 그런다. 하지만 '승리'를 자축하며 모여 치켜든 그들의 축배에 도저히 엄지를 세우진 못하겠다.

 

  권순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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