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의「릴레이」해설 / 김기택
릴레이
유홍준(1962~ )
나는 뛴다 머리통을 들고 뛰어온 너에게 머리통을 받아들고 뛴다 이 둥근 바통을 누구에게 건네주어야 하나 아무도 없는 트랙을 뛴다 밥의 트랙 눈물의 트랙 한숨의 트랙 벗어나서는 안되는 트랙을 나는 뛴다 머리통이 식기 전에 눈알이 굳기 전에 누구에게 이 골칫덩어리를 건네주어야 하나 나는 트랙을 이탈한다 흰 트랙으로부터 탈출한다 무단횡단을 한다 나는 이면도로를 거꾸로 뛰어간다 나는 젖이 큰 여자 젖이 퉁퉁 불어 있는 여자를 찾는다 머리통을 받아들고 앞섶을 풀어제치고 젖을 먹일 여자를 찾는다 트랙이 어느새 나를 쫓아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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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학교 운동회 때 릴레이는 인기 있는 종목이었다. 릴레이 경주는 실력보다 실수가 승부를 결정하는 일이 종종 있다. 잘 뛰는 것 못지않게 바통을 잘 넘겨야 하기 때문이다. 바통이 다른 손으로 넘어가면 역전되는 일도 자주 있어서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하곤 했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바통 대신 머리통을 받아 달려야 하는 인생이라는 릴레이 경주라면 어떨까. 아버지처럼 살기 싫다고, 아버지가 가던 길로 달리기 싫다고, 목에서 떼어내 다른 사람에게 줘버릴 수도 없는 머리통. 이걸 목 위에 얹어놓고 어떻게 해야 하나.
어느 날 아침에 눈떠 보니, 제집은 이웃집보다 가난하고 자신은 친구보다 못생겼으며 엄마 친구의 아들보다 성적은 형편없다면? 자신이 부모로부터 받은 삶의 내용물이란 게 터무니없이 초라하다면? 어른들이 하라는 것 다하고 교과서에서 가르쳐 준 대로 충실하게 살았는데 알바 트랙과 비정규직 트랙만 보장된다면? 그게 싫어서 이 시의 화자는 정해진 트랙을 벗어나 온갖 일탈을 일삼으며 별짓을 다해 봤지만, 어느새 여자가 붙고 자식이 붙어서 어쩔 수 없이 “밥의 트랙 눈물의 트랙 한숨의 트랙”을 뛰고 있다. 그래도 달려야지 어떡하겠는가. 아, 어쩌자고 시인은 이 구차하고 절망스러운 삶을 이렇게 흥이 나고 유쾌하게 썼단 말인가.
김기택(시인)